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李浚慶어머니 신씨의 寡子倍學(과자배학) 본문
寡子倍學(과자배학)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유래
조선 명종(明宗) 때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호는 동고(東皐)이다. 중종(中宗) 17년에 생원이 되는 것으로 관직에 올라 명종(明宗) 20년(1565년)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와중에 죄인을 변호했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 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다시 복귀되었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덕망이 높았다.
준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는데, 어머니 신씨는 효경편(孝敬編)의 내용대로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
“효경에 과부의 아들과는 사귀지 말라 했느니라, 이는 과부의 자식은 자칫 버릇이 없을 수 있어 그를 경계한 말이니, 너는 반드시 남보다 열 갑절이나 더 조심하고 잘 배워서 모범이 되도록 하여라.”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여, 형 윤경(潤慶)과 함께 종형 연경(延慶)의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마침내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여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사헌 때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나중에 풀려나 함경도 순변사가 되어 북쪽 변방의 국방을 맡았고, 다시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호남지방에 침입하는 왜적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애까지 올랐으나 1567년 명종이 승하하자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정적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그가 죽을 때 붕당(朋黨)이 심해질 것이라 예견하여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실제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매,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혜안을 인정받기도 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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