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불을 끄고 새 불로 가는 시간적 필요성에서 한식날만은 불을 써선 안 되도록 되어 있었기에 찬밥 먹는 날이 돼 버린 것이다.
고대 로마의 중심부에 베스터라 불리던 불의 신전(神殿)이 있었다. 그 신전의 복판에 성화대(聖火臺)가 있어 연중 불이 타올랐는데, 매년 정초마다 베스터리스라 불리던 여사제(女司祭)가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뒤 헌 불을 끄고 새 불로 갈았다. 그리고 이 새 불을 로마의 모든 귀족과 시민과 노예들이 반화(頻火)받아 오로지이 한 불을 나누어 쓰는 대가족으로 강한 공동체의식을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기본의 《로마제국멸망사》에 보면 로마가 그토록 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16세기까지 끊이질 않고 타올랐던 이 베스터의 성화를 나누어 쓰는 결속된 공동체요, 숙명체라는 자의식이었다 한다.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도 베스터의 성화처럼 온 백성이 한 불을 썼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고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한식(寒食)날, 궁중에서는 느릅나무나 버드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서 임금에게 바쳤고, 임금은 이 새 불을 육조대신(六曹大臣)들과 팔도감사(八道監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불이 아래로 아래로 전달되어 온 백성이 기운이 쇠한 헌 불을 새 불로 갈았다. 헌 불을 끄고 새 불로 가는 시간적 필요성에서 한식날만은 불을 써선 안 되도록 되어 있었기에 찬밥 먹는 날이 돼 버린 것이다.
로마와 한국은 한 불을 더불어 씀으로써 결속했던 똑같은 공동체인데, 왜 로마는 그것이 내셔널리즘으로 승화되어 그토록 융성하고 우리나라는 그러하지 못했을까. 역사의 어느 시기에 이 한식날의 반화가 귀족이나 사대부 등 서울의 상류계급에만 국한되게 되었고, 따라서 여느 백성들은 각 가문별로 종가(宗家)에서 새 불을 일으켜 집안에 반화하는 제도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민이 불을 나누어 쓰던 로마에선 내셔널리즘이 발달했고, 전가문이 불을 나누어 쓰던 한국에선 가족주의가 유별나게 발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종가에서 나누어 받은 새 불을 씨불[種] 화로에 담아 간수했는데, 그 씨불화로는 바로 주부권(主婦權)의 상징이었기에 그 집 주부는 로마의 여사제처럼 연중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유념해야 했다. 이를테면 씨불을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 태운 재로 덮는다든지, 장마철에는 장화통(藏火筒)이라 하여 계란칠을 한 닭껍질로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간직하기도 했다.
제삿날 향불은 반드시 이 씨불로 태워야 했고, 그 집 식구가 먹는 밥도 반드시 그 씨불로 지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 씨불로 짓는 한솥밥을 먹는 한계도 엄연하였다. 이를테면 손님에게 밥을 낼 때 친계(親系)로는 5등친(五等親), 외계(外系)로는 3등친(三等親), 처계(妻系)로는 2등친에 한해서 씨불로 지은 한솥밥을 내고, 그 밖의 손님은 씨불 아닌 불로 딴 솥에 밥을 지어 내는 게 법도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식날의 씨불은 가족공동체의 구심체요 존재 이유이며, 가치요 조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증발하고 없는 한식날의 씨불과 지리멸렬해 가는 오늘날의 가족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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