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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한화골계전79-自居口辯 본문

漢詩와 漢文/太平閑話滑稽傳

태평한화골계전79-自居口辯

耽古樓主 2025. 1. 4. 03:41

太平閑話滑稽傳

 

 

自居口辯

 

興德寺僧一雲 自矜口才 天下無雙 有日者崔揚善 以好辯自居.

興德寺의 승려 一雲은 말재주가 세상에서 짝이 없다고 스스로 뻐겼는데, 日者인 崔揚善이라는 사람도 말을 잘한다고 자처하고 있었다.

興德寺: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1가에 있었던 절인데,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 있다. 흥덕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흥덕골" 또는 "흥덕동(興德洞)이라고 불렀다. 산수가 매우맑고 아름다운 가운데 온갖 꽃나무, 화려한 누각, 큰 연못들이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이 연달아 피어 늘 꽃동산을 이루었기 때문에, 京都十詠의 하나인 興德賞花 또는 興德賞蓮으로 이름났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동부 燕喜坊에 있던 敎宗 사찰에 흥덕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있었다. 이 절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권근(權近)德安殿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한 흥덕사가 이 절들 가운데 어느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一雲: <조선왕조실록>, 본래 경상도에 있던 스님이었는데, 세종 24興天寺 慶讚會 法主로 올라왔다가 내려갈 때 임금이 그에게 역말을 내려 돌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28中宮의 병이 심해지자 세종이 중 80명을 시어소(時御所)에서 기도하게 하고, 일운에게 그 공으로 홍단(紅段) 1, 황견(黄絹) 3, 細紬 1, 白綿布 3필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같은 해의 기록에 津寬寺에서 二齋를 베풀 때 흥덕사 주지승이었던 일운이 禱病에서 設齋까지 모든 설법을 주장해 재물을 많이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흥덕사의 스님인 일운"이라고 한 것은 그가 흥덕사 주지를 지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日者: '日官'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諏吉官이라고도 한다. 觀象監에서 길일(吉日)을 택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다. 오늘날 관점에서 '擇日하는 사람이나 점쟁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崔揚善: 조선 초기의 術士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13風水 학생으로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 藏義洞 門觀光坊 동쪽 고갯길에 길을 열지 말 것을 건의해 관철시켰고, 세종 때는 서운장루(書雲掌漏)를 지냈다.

 

雲曰

當今之時 豈有口辯而居雲之右者乎 我當以一言折之

일운이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口辯 좋기로 일운의 오른쪽에 설 자가 어찌 있겠는가?

내 마땅히 한마디 말로 그를 꺾어 주리라."

오른쪽에 설 자: 右者. '나은 사람', '수준이 더 높은 사람을 말한다. ""에는 '', '상위'라는 뜻이 있다.

 

訪揚善于第 揚善隱几 使兒輩 應門.

집으로 揚善을 찾아가니, 양선은 案席에 기대어서 아이로 하여금 문간에서 응대하게 했다.

 

雲曰

主人何之

兒曰

隣家一人地折脚 家公 欲以冬瓜續之而去

일운이 묻기를

"주인은 어디 가셨느냐?"

라고 하자, 아이가 말하였다.

"이웃의 어떤 사람이 땅에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아버지께서는 동과(冬瓜)로 그것을 이어 주러 가셨습니다."

冬瓜: 동아. 박과에 속하는 일년생 덩굴성 식물로 그 열매는 긴 타원형이며 호박 비슷하게 생겼으나, 표면에 털이 많다. 여기서는 그 열매를 말한 것이다.

 

雲曰

天下未聞冬瓜續脚者

일운이 말하였다.

“세상에 동과로 다리를 이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兒曰

苟不以冬瓜續脚者 和尙何能以西瓜續頭乎.

아이가 말하였다.

"만약 동과로 다리를 이을 수 없다면, 스님께서는 어찌 수박으로 머리를 이을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어찌 있겠습니까?: 박박 깎은 스님의 머리를 수박으로 보고 이렇게 말하였는데, 수박은 머리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西瓜: 수박을 뜻한다. 일사본민자본에서는 西果라고 했으나 이는 '西瓜'의 착오로 판단된다.

 

雲不覺屈膝曰

兒輩家如是 主公可知也

일운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아이가 이러하니 주인을 가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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