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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오상순

耽古樓主 2023. 3. 4. 02:49

공초 오상순. 그에게서 담배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내 일찍이 고독(孤獨)의 몸으로서 적막(寂寞)과 무료(無聊)의 소견법(消遣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子息)삼아 정원(庭園)에 놓아 기르기 십개성상(十個星霜)이러니, 올여름에 천만(千萬)뜻밖에도 우연(偶然)히 맹견(猛犬)의 공격(攻擊)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非命)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殘存)하여 극도(極度)의 고독(孤獨)과 회의(懷疑)와 비통(悲痛)의 나머지, 식음(食飮)과 수면(睡眠)을 거의 전폐(全廢)하고, 비 내리는 날 밤,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庭園)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斷腸曲)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忽然) 긴장(緊張)한 모양(模樣)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 오는 쪽으로 천방지축(天方地軸)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무문(寂寂無聞),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다시 외치며 제소리 울려 오는 편(便)으로 쫓아가다가 결국(結局)은 암담(暗澹)한 절망(絶望)과 회의(懷疑)의 답답한 표정(表情)으로 다시 돌아서는 꼴은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묻은 말은 주고받고 못하나, 너도 나도 모르는 중에 일맥(一脈)의 진정(眞情)이 서로 사이에 통()하였던지, 10()이란 기나긴 세월(歲月)에 내 홀로 적막(寂寞)하고, 쓸쓸하고 수심(愁心)스러울 제, 환희(歡喜)에 넘치는 너희들의 요동(搖動)하는 생태(生態)는 나에게 무한(無限)한 위로(慰勞)요 감동(感動)이었고, 사위(四圍)가 적연(寂然)한 달 밝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自身)도 모르게 무심(無心)히 외치는 애닯은 향수(鄕愁)의 노랫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천지적막(天地寂寞)의 향수(鄕愁)를 그윽히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러니-. 고독(孤獨)한 나의 애물(愛物), 내 일찍이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칠 능()이 있었던들, 이내 가슴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事情)과 정곡(情曲)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呼訴)도 해보고, 기실(其實) 너도 나도 꼭 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共鳴)도 하고, 같이 통곡(慟哭)도 해보련만, 이 지극(至極)한 설움의 순간(瞬間)의 통정(通情)을 너로 더불어 한가지로 못하는 유한(遺恨)이여-.
외로움과 설움을 주체못하는 순간(瞬間)마다 사람인 나에게는 술과 담배가 있으니, 한 개()의 소상바눅(瀟湘斑竹)의 연관(煙管)이 있어 무한(無限)으로 통()한 청신(淸新)한 대기(大氣)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서린 설움을 창공(蒼空)에 뿜어내어 자연(紫煙)의 선율(旋律)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曲線)을 그리며, 허공(虛空)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哀愁)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히 쉴 수도 있고, 한 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오르는 억제(抑制) 못 할 설움을 달래며, 구곡간장(九曲肝腸) 속으로 마셔들어 손으로 스며들게 할 수도 있고, 12() 가야금(伽倻琴)이 있어 감정(感情)과 의지(意志)의 첨단적(尖端的) 표현기능(表現機能)인 열 손가락으로 이 줄 저 줄 골라 짚어 간장(肝腸)에 어린 설움 골수(骨髓)에 맺힌 한()을 음율(音律)과 운율(韻律)의 선()에 실어 찾아내어 기맥(氣脈)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절(切切)한 이내 가슴속 감정(感情)의 물결이 열두 줄에 부딪쳐 몸부림쳐가며 운명(運命)의 신()을 원망(怨望)하는 듯 호소(呼訴)하는 듯 밀며 땡기며, 부르며 쫓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먹으며, 높고 낮고 길고 짜르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가며 감돌아들며, 미묘(微妙)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 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深然)한 선율(旋律)과 운율(韻律)과 여운(餘韻)의 영원(永遠)한 조화미(調和美) 속에 줄도 잊고, 나도 썩고 도연(陶然)히 취()할 수도 있거니와-. 그리고, 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應當) 이 곡조(曲調)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暫時)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 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 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 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복(幸福)하며 내 얼마나 구제(救濟)되랴. 이 내 애절(哀切)한 심사(心事), 너는 모르고도 알리라. 이 내 무자비(無慈悲)한 심술(心術), 너만은 알리라.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人間). 말 못하는 짐승이라 꿈에라도 행()여 가벼이 보지 말지니, 삶의 기쁨과 죽음의 설움을 사람과 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보다도 더 절실(切實)한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생사운명(生死運命)에 무조건(無條件)으로 절대(絶對) 충실(充實)하고, 순종(順從)한 순교자(殉敎者)-. 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優越感)을 버리고 운명(運命)의 반역자(叛逆者)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嚴格)한 운명(運命)의 지상명령(至上命令)에 귀일(歸一)하는 결론(結論)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本來) 본성(本性)이 솔직(率直)한 동물(動物)이라, 일직선(一直線)으로 살다가 일직선(一直線)으로 죽을 뿐, 사람은 금단(禁斷)의 지혜(智慧)의 과실(果實)을 따 먹은 덕()과 벌()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물(動物)이라, 직선(直線)과 동시(同時)에 곡선(曲線)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10()을 하루같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기거(寄居)와 동정(動靜)을 같이하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생활감정(生活感情)을 같이하며, 서로 사이에 일맥(一脈)의 진정(眞情)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無數)한 인간(人間)을 접()해 온 10() 동안에 너만큼 순수(純粹)한 진정(眞情)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못할 파멸(破滅)의 비극(悲劇)에 직면(直面)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曲線)의 기술(技術)을 모르는 솔직단순(率直單純)한 너의 숙명적(宿命的) 비통(悲痛)을 무엇으로 위로(慰勞)하랴. 너도 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永遠)한 망각(忘却)의 사막(沙漠)으로 사라지는 최후(最後)의 순간(瞬間)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망우초(忘憂草) 태산(泰山) 같고 술이 억만(億萬) ()인들 한()없는 운명(運命)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伽倻琴) 12()에 또 12()인들 골수(骨髓)에 맺힌 무궁(無窮)한 이 원()을 만분(萬分)1이나 실어 탈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본들 이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期約) 있으랴. 간절(懇切)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저것 다 없다는 본래(本來) 내 고향(故鄕) 찾아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故鄕)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故鄕) 어이 찾을꼬. 참 내 고향(故鄕) 어이 찾을꼬.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 뜰 앞에 오동(梧桐)잎 떨어지는 소리 가을이 완연(宛然)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只今)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異常)도 할사, 내 고향(故鄕)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故鄕)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듯한 나는 방금(方今) 네 속에서 내 고향(故鄕) 보았노라. 천추(千秋)의 감격(感激)과 감사(感謝)의 기적적(奇蹟的) 순간(瞬間)이여. 이윽히 벽력(霹靂)같은 기적(奇蹟)의 경이(驚異)와 환희(歡喜)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枕頭)에 세운 가야금(伽倻琴) 이끌어 타니, 오동(梧桐)나무에 봉()이 울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 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萬象)이 적연(寂然)히 부동(不動)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呻吟)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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