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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우회취지서

耽古樓主 2023. 3. 4. 03:02

대한매일신보의 청년학우회취지서

()으로 선민(先民)의 유서(遺緖)를 속()하여 기() ()을 기()하고 기() ()을 보()하며 하()로 동포(同胞)의 선구(先驅)를 작()하여 기() ()을 월()하고 기() ()에 취()할 자()는 즉() () 일반(一般) 청년(靑年)이 기() ()이라. ()로 청년(靑年)은 일국(一國)의 사명(司命)이며 일세(一世)의 도사(導師)이거늘 연이(然而) 아국(我國)은 이래(邇來)로 염담(恬談) 퇴수(退守)를 도덕(道德)이라 하며 편벽고루(偏僻孤陋)를 학술(學術)이라 하고 사위무실(詐僞無實)을 능사(能事)라 하며 환산(渙散) 결렬(決裂)이 성습(成習)되어 풍속(風俗)이 일퇴(日退)하고 인심(人心)이 일부(日腐)하여 청년(靑年) 사회(社會)에 일 점(一點) 태양(太陽)이 부조(不照)하므로 기() ()은 청년(靑年)이로되 기() 기력(氣力)의 피폐(疲弊)는 노년(老年)과 동()하며 기() ()는 청년(靑年)이로되 기() 지식(智識)의 몽매(蒙昧)는 유년(幼年)과 동()하니 청년(靑年), 청년(靑年)이여, ()가 어찌 청년(靑年)이리오. 목하(目下) 문명(文明)의 맹조(猛潮)가 폐호(閉戶)의 완몽(頑夢)을 타경(打驚)하여 천 리(千里)에 급()을 부()하고 내두(來頭)의 정도(程途)를 멱()하는 자()가 고다(固多)하나 단() 부패(腐敗)한 구속(舊俗)을 개혁(改革)하고 진실(眞實)한 풍기(風氣)를 양성(養成)하려면 학술(學術) 기능(技能)으로만 기() ()을 수()할 바가 아니며 언론(言論) 문장(文章)으로만 기() ()를 주()할 바가 아니오. 불가불(不可不) 유지(有志) 청년(靑年)이 일대(一大) 정신단(精神團)을 조직(組織)하여 심력(心力)을 일치(一致)하며 지식(智識)을 호환(互換)하여 실천(實踐)을 면()하고 전진(前進)을 책()하여 험()과 이()에 일시(一視)하며 고()와 낙()에 상제(相濟)하고 유속(流俗)의 광란(狂瀾)을 장()하며 전도(前途)의 행복(幸福)을 구()하여 유신(維新)의 청년(靑年)으로 유신(維新)의 기()를 축()할지라. ()로 본회(本會)를 확립(確立)코자 취지(趣旨)를 발()하여 아() 청년계(靑年界)에 포()하노니 유() () 유지(有志) 청년(靑年)이여.

 

융희 3(1909) 8

발기인(發起人)

윤치호(尹致昊), 장응진(張膺震), 최남선(崔南善), 최광옥(崔光玉), 박중화(朴重華) ()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판), 1909817, 1.

 

 

신문관은 정기 간행물 발행과 단행본 출판 사업으로 그치지 않고 문예와 학술을 비롯한 문화 계몽 운동의 전 방위에서 시대정신을 대변했습니다. 이를테면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와 조선 광문회(朝鮮光文會)의 실질적인 구심점 역할을 신문관이 떠맡았기 때문입니다.

신문관은 단기간에 한국 출판문화의 전당으로 고도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관이라는 출판 브랜드를 통해 사회 운동의 확산과 근대 한국학의 성립을 위한 기초를 닦는 데에 공헌했습니다. 신문관이라는 이름은 이를테면 1910년대의 문화 역량을 한데 결집시키고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자본과 기술 매체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청년 학우회는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 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외곽 단체 가운데 하나로 신문관의 창립 이듬해인 19092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신민회는 교육 기관으로 대성 학교(大成學校), 서점으로 태극 서관(太極書館), 실업체로 평양 자기 제조 회사(平壤瓷器製造會社), 협성동사(協成同事), 상무동사(商務同事), 그리고 합법적인 청년 대중 운동 단체로 청년 학우회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청년 학우회는 훗날 흥사단의 모태가 된 청년 운동 조직체입니다. 최남선은 청년 학우회의 중앙 총무이자 전국 순회 강연자로 나섰으며, 신문관을 임시 사무소로 삼고 갓 창간한 월간 종합 교양지 소년의 부록으로 <청년 학우회보>를 편성하여 기관지 역할까지 매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