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同散異

조맹부(趙孟頫)

耽古樓主 2023. 3. 4. 02:40
1.개요

 

중국 원대의 관료, 서화가.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오흥(저장성) 사람.

송 태조 넷째 아들 진왕 덕방의 자손으로 태조의 11대 손자이다.

지원 23(1286) 세조(홀필열)가 강남 인재를 구했을 때 오흥 팔준의 필두로 추천되어 이후 5대 황제에 역사(歷仕)하다. 관은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렀고 사후에는 위국공에 추봉되었고 문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문은 청수기일한 맛이 있고 서화와 함께 원대의 제일인자로 일컬어졌다. 서에 있어서는 전서 문예 초서 등 각체에 능통했고 특히 왕희지로의 복귀에 힘써서 그 서풍은 이후의 시대 및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서예 작품에는 난청첩십삼발, 한읍암전, 여중봉명본척적등이 있다.

화에 있어서는 당, 북송화풍을 모범으로 하는 복고주의를 따라 이사훈, 이소도의 청록산수, 동원, 거연의 소위 동거파 화풍 및 이곽파 양식을 받아들여 원대 산수화의 전형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대표작에 작화추색도권(타이페이 고궁박물원), 강촌어락도, 수촌도권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송설재문집이 있다. 가족 중에는 부인인 관도승, 아우인 조맹유, 아들인 조용, 조역 등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이 많았다.

ㅋ玄妙觀重修三門記.  조맹부가 중봉스님에게 써준 글  心經冊

 
2. 조맹부의 서예

 

조맹부는 여러 기예 중에서도 서예에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그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의 전통이 당나라 중엽 이래황폐화했다는 것을 개탄하면서 왕희지로의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그의 글씨는 법도가 근엄하고 체세가 수려하면서 고르고우아한 운치가 있으며,필법은 둥글고 윤택하면서 굳세며 전환하는 곳이 유창하고 교묘함을 빌렸지만 섬세하고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으로는 근골을 함유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움이 흘렀다.

이토록 뛰어난 글씨였기에 후세에조맹부체, 또는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라고 불렀다.

閑居賦 ( 한거부 )  행서 ----------瘡痍帖 ( 창이첩 ) 행서

조맹부의 서예가 이와 같은 성취를 이루게 된 것은그의 서예에 대한 천부적 재능도 있었지만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맹부는 다섯 살 때 글공부를 시작해 이후 수십 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공부법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는 어쩔 수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하거라"

라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혜진은 그가 글씨를 공부함에 '십 년 동안 누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十年不下樓)' 라고 하였으며도종의는 그가 '하루에 가히 만 자를 썼다(一日可寫萬字)' 라고 하였다.


물론 과장된 표현도 있겠지만 그의 굳센 의지와서예 공부에 대한 부단한 노력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致季統山長尺牘 ( 치계통산장척독 )  행초서 ---------- 致子敬敎授尺牘 ( 치자경교수척독 )  행서

조맹부는 송나라 황실의 후예로서송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에 벼슬했다는 것은세간의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조맹부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그림으로 그리고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의 때를 갖게 되니
벼슬하거나 은둔하거나 각자 천명이 있다."
이렇게 그림에 화제를 씀으로써 세상의 비난에 담담하게 대응했다.


조맹부는 절개를 굽혔다는 오명을 무릅쓰고라도 원 왕조에 벼슬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망했으나 선비들이 돌보아야 할 백성은 그대로 있고, 중화의 문명이 자칫 스러질 위기에 누군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山上帖 ( 산상첩 )  행서

 

 

박돌천시(趵突泉詩) -- 행서 ---- 소식고시(蘇軾古時) -- 행서

 

이러한 조맹부를 이해하며 벗이 되어주었던 사람은 아내 관도승이었다.
조맹부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관도승은 28세 때 조맹부를 만났는데 이때 그녀도 서화가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만남부터 두 사람은 인품과 예술에 반해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함께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으며, 한가할 때면 호수에 배를 띄우고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조맹부가 한 번은 최운영이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하자, 관도승은 시를 지어
"부디 살아생전 한 이불을 덮고 죽어서는 하나의 무덤에 들기를"
이라고 읊으니 조맹부가 뜻을 접었다고 전한다.

조맹부의 아내 관도승 ( 管道昇 ) 이 중봉스님에게 써준 서간; ' 致中峰和尙尺牘 '  행서

 

조맹부의 송설체는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의 이제현을 통해서 고려 말 조선 초에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조선의 안평대군이다.
조맹부의 필법에 바탕을 둔 안평대군의 글씨는 용재총화에서  '호매한 필력과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 행서

조맹부의 아들 조옹의 회정토시 ( 懷淨土詩 )  행서; 千字文 장초
 

조맹부의 아들 조옹도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버지 조맹부를 능가하지는 못 했다.

 

3.조맹부의 회화

작화추색도 ( 鵲華秋色圖 )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조맹부 ( 趙孟頫 ) / 인기도 ( 人騎圖 ); 종이에 채색 , / 북경 고궁박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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