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同散異

진번하탑(陳蕃下榻)

耽古樓主 2023. 3. 4. 02:47

진번하탑(陳蕃下榻)

진번(陳蕃)은 태어난 해는 알수 없고 168년에 죽은 동한왕조의 대신이다.

자는 중거(仲擧)고 여남(汝南) 흥평(興平) 출신이다.

환제(桓帝 ; 재위 147-167년) 때 군권을 총괄하는 태위(太尉)가 되어 이응(李膺) 등과 함께 발호하는 환관세력에 반대하여 태학(太學)의 유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은 진중거(不畏強禦陳仲舉)’라는 별칭을 얻었다.

영제(靈帝 ; 재위 168-189년)가 서자 그는 태부(太傅)가 되어 외척 두무(竇武)와 모의하여 환관들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비밀이 새나가자 관리들과 태학의 유생 80여 명을 이끌고 궁문을 뚫고 나갔으나 실패하고 자신은 살해되고 말았다.

 

초당 4걸 중의 한 사람인 당조의 왕발은 그의 불후의 명작 등왕각서에서 진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곳 물산의 정화는 하늘이 내린 보배이니

용천검의 광채가 견우성과 북두성 사이를 쏘았고

인물은 걸출하고, 땅은 영기가 있어

서유자(徐儒子)는 태수 진번(陳蕃)이 내주는 평상에 앉았다.

 

物華天寶(물화천보)

龍光射牛斗之墟(용광사우두지허)

人傑地靈(인걸지영)

徐孺下陳蕃之榻(서유하진번지탑)

 

용광(龍光)은 용천검의 검광을 말한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진혜제(晉惠帝) 때 승상 장화가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보고 당시 천문에 정통했던 남창인 뇌환(雷煥)이라는 사람을 불러 물었다. 뇌환은 그것은 보검의 정광으로써 그 기운이 위로 뻗쳐 하늘에 닿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보검은 풍성(豊城)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이름이 풍성시인 이곳은 강서성 파양호 남단에 있다. 장화는 뇌환을 풍성령(豐城令)으로 임명하여 보검을 찾도록 했다. 임지에 당도한 뇌환은 옥사의 터를 파기 시작해서 4장여를 도 파내려가 돌로 만든 상자를 얻었는데 그 속에서 뻗어나오는 광채가 눈부셨다. 그 안에서 두 개의 검을 얻었는데 하나는 용천(龍泉)이고, 하나는 태아(太阿)였다. 후에 강을 건너다가 물속에 빠뜨리자 검이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갔다고 했다.

 

또한 서유자(徐儒子)는 당시 향리에 은거하며 농사에 힘써 덕행을 많이 쌓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서치(徐稚)를 말한다. 예장태수로 부임한 진번이 서치를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곤 했다. 그때마다 진번은 특별히 평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서치가 간 다음 세워 벽에 달아놓았다. 사람들은 어진 사람을 극진히 대접할 때 진번이 서유자에게 행한 일을 빌어 진번하탑(陳蕃下榻)이라고 했다.

 

진번은 고위 관리였고 서유자는 이름 없는 일개 유자였으나 식사 한끼와 한 개의 평상으로 지식인에게 존경을 표하여 예현하사(禮賢下士)의 천고에 전하는 미담을 남겼다.

 

진번은 수대에 걸쳐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조부는 河東太守의 직에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외따로 떨어진 방에 혼자 지내면서 오로지 성현들의 저술들만을 읽었다. 방안에는 온갖 쓰레기들과 책으로 난잡했고, 정원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 그는 결코 정리하거나 청소하지 않았다.

부친의 친구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유자(孺子)는 어찌하여 집안을 정리하지 않고 손님을 대하는가?”

진번이 대답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왔으면 천하를 청소하는데 뜻을 둬야지 어찌 방 한 칸을 청소하는 데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진번의 태도는 ‘방 한 칸도 청소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천하를 청소할 수 있겠는가?’라는 전통적 관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장차 그가 비극적인 인생을 맞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후에 관리가 된 진번은 평소에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개 개인들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들과 나눈 우스개소리가 후에 사단으로 발전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상한 인품의 지식인들을 대할 때는 오히려 정리를 매우 깊게 나타내어 파격적인 방법으로 대했다. 손님과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부족하면 숙소에 머물게 했다.

후한서 진번전(陳蕃傳)에 따르면 그가 청주자사 이응(李膺) 부중에 막료로 있을 때 군내에 학식이 높은 주구(周璆)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품성이 고결한 선비였는데 전임의 자사들이 여러 번 불러 그들의 막료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구는 매번 거절하고 그들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쳐 살았다. 그러나 진번과만은 연락을 끊지 않고 왕래를 계속하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주구가 진번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촛불을 켜고 밤을 새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진번은 관리들에게 특별히 명하여 긴 침상을 만들게 해서 주연석 옆에 놓고 그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침상을 수습하여 벽에 걸어두곤 했다. 후에 진번이 예장태수(豫章太守)에 부임하자 그는 군내의 서유자(徐儒子)라는 사람과 교우를 맺었다.

후한서 서치전(徐稚傳)에 따르면 시서(詩書)와 경론(經論)에 통달한 서치는 이름이 남쪽 지방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정에서 여러 번 그를 불러 관리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 권력을 잡은 환관들이 발호하고 관리들은 부패했다고 생각해서 그들 속에 섞여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민간에 섞여 살면서 장막을 치고 학문을 강연하며 도를 논했다.

태수로 부임한 진번은 그의 고결한 이름을 듣고 예를 갖추어 그를 대했다. 친히 그의 집을 예방하고 그에게 태수부의 공조(功曹) 자리를 맡아달라고 청했으나 서치는 한사코 사양하고 그 자리에 부임하지 않았으나 수시로 태수를 손님으로 찾아가 담화를 나누고 돌아가곤 했다.

진번은 특별히 침상을 만들어 놓고 서치 전용으로 사용하게 하고 그가 돌아간 후에는 벽에 걸어두었다. 후에 많은 사람들이 손님을 접대할 때 진번이 한 행위를 본받았다.

 

남사(南史) 공휴원전(孔休源傳)에 양(梁)나라의 진안왕(晉安王)이 공휴원을 위해 서제에 침상을 만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렸다는 기사가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0 송의서(宋議書)에 북조의 석혜림(釋惠林)이 위문제(魏文帝)로부터 상을 받을 때 기사가 있다. ‘ 황제가 매번 석혜림을 접견할 때는 홀로 침상에 올라앉게 했다.’ 후에 하탑(下榻), 해탑(解榻)、치탑(置榻)、괘탑(掛榻)、현탑(懸榻)、현상(懸床)、소탑(掃榻)、서탑(徐榻)、서유탑(徐孺榻)、치탑(稚榻)、고사탑(高士榻)、진탑(陳榻)、진번탑(陳蕃榻)、고현일탑(高懸一榻)、일탑고현(一榻高懸)、일탑괘벽(一榻掛壁) 등의 말은 현인이나 귀중한 손님을 맞이할 때 행하는 예의를 표하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또한 어진 주인과 훌륭한 신분의 손님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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