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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와 漢文

詠菊詩 6首

耽古樓主 2025. 2. 16. 04:21

詠菊詩 6

 

<詠黃白二菊-高敬命>

正色黃爲貴 天姿白亦奇.
世人看自別 均是傲霜枝.

정색인 황색을 귀하게 여기되, 타고난 자태가 흰색도 남다르지.

世人은 보고서 구별하지만, 모두가 서릿발 이겨내는 가지라네.

 

작자-고경명(1533~1592)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며, 금산전투를 이끌다 전사한 문신 · 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 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고자검(高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해, 곧바로 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 ·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 · 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이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서산군수로 전임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천거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 · 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官軍)을 모았다.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 ·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 · 안영(安瑛) · 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 · 양사형(楊士衡) · 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 · 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해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담양을 출발해 북상을 개시했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고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 · 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했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해 고인후에게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무주 · 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했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고종후 · 고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 · 경기 · 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했다.

 

27일 은진에 도달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 · 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당초의 북상 계획을 변경, 7월 1일연산(連山)으로 회군했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해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해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 · 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곽영과 합세해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로 선제 공격을 했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했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고경명은 후퇴해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 · 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해 금산 산중에 매장했으며, 10월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 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했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고경명을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 · 글씨 ·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 · 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詠菊-高徵厚>

微草幽貞趣 正猶君子人.
斯人不可見 徒與物相親.

보잘것없는 화초가 그윽하고 곧은 정취를 지녀, 바로 군자와 같구나.

이런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다만 국화하고나 친해 보려네.

 

작자-高徵厚

 

조선 현종 때 문인

 

 

菊-沈周

老我愛種菊 自然宜野心.
秋風吹破屋 貧亦有黃金.

늙은 내가 국화 심기를 좋아함은, 그 모양 그대로 내 마음과 어울리기 때문

가을바람 불어 집을 부쉈지만, 가난해도 나는야 황금을 가졌다네.

 

감상

 

明나라 沈周(1427~1509)는 명문가 출신으로 詩畵에 능하여 南宗畵의 대가로 알려지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표현한 시를 지었다.

 

 

秋花-査愼行

雨後秋花到眼明 閒中扶杖繞階行.
畵工那識天然趣 傅粉調朱事寫生.

비 갠 뒤 국화 눈부시게 피매, 한가로이 지팡이 짚고 섬돌을 돌아 나서네.

화공이 어찌 천연의 멋을 알랴. 분 바르고 물감칠로 부질없이 그 모습 그리려 드네.

 

작자-査愼行

 

중국 청대(淸代) 초기의 시인. 자 회여(悔余). 호 초백(初白)․타산(他山).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사람. 1703년 진사(進士)가 되어 한림원 편수관에 임명되었다. 강희제(康熙帝)의 신임이 두터워 황제의 여행 때에는 동행하며 많은 시를 지어 황제의 칭송을 받았으나, 관료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7년 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자유생활을 즐겼다.

 

그의 시를 모은 <경업당집(敬業堂集)>(50권) <경업당속집(敬業堂續集)>(6권)이 있다. 그의 시는 송나라 소식(蘇軾)의 작품을 본보기로 하여 수식에 기울지 않고 자기 의사를 서술하면서도 묘취를 얻는 풍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어양(王漁洋)이나 주죽택(朱竹祉) 등 시인들이 주로 격조를 중시하던 시풍을 일소하여 청나라 초기 시단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그가 나온 이후 청조에서는 오랫동안 송(宋)의 시풍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는 황종희(黃宗羲)에게 배우고, 1703년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원래가 명리(名利)에는 담박(淡泊)하여 각지의 명승을 유력(遊歷)하며, 이것을 시로 읊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왕사정(王士禎)이 당(唐)의 시를 배운 데 대하여, 그는 송시(宋詩)를 배우고, 특히 육유(陸游)의 작풍을 전하였다.

 

 

菊花煎- 崔永年

采采東籬菊有芳 招呼詞客侑壺觴.
腹中不畜腥臊氣 能吸秋來一種香.

동쪽 울타리에서 향기로운 국화 따다가, 글 친구 모셔 와서 술대접 하네.

배 속에 고기 비린내 따위 남겨두지 않고, 가을의 향기를 들이마신다네.

 

해설

 

菊花煎은 작자가 崔永年(1856∼1935)이고, 그가 쓴 海東竹枝라는 책에 실려 있다. 최영년은 조선 마지막 서리 출신의 가난한 시인이었다. 삼현금을 잘 탄 풍류객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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