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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0章 草書(초서) 본문

論書賸語

第10章 草書(초서)

耽古樓主 2024. 2. 1.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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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書賸語



1

右軍以後無草書.
右軍 이후에는 草書가 없다.

雖大令親承過庭之訓 亦已非復乃翁門仞.
大令은 직접 父親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미 그의 父親의 훌륭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顛素已降則奔逸太過.
張顚과 懷素 이후로는 奔逸함이 매우 지나치다.

所謂驚蛇走虺勢入戸 驟雨旋風聲滿堂」 不免永堕異趣矣.
이른바 놀란 뱀과 질주하는 이무기의 氣勢가 문에 들고 소낙비와 회오리바람 소리가 집에 가득하다.이니영원히 異趣에 빠짐을 면치 못할 터이다.

孫虔禮謂:
子敬以下莫不鼓努爲力標置成體.
孫虔禮가 말하였다.
子敬 以下는 모두 기운이 밖으로 나타남을 筆力으로 여기고 標置가 를 이룬다

內不足者外必張 非直世降風移之故也.
안으로 충실치 못한 자가 밖으로 항상 과장하니다만 世代가 바뀌고 풍속이 바뀜에 의한 까닭만이 아니다.

余論草書
須心氣和平 斂入規矩 使一波一磔 無不堅正 乃爲不失右軍尺度.
稍一縱逸 即偭規改錯 惡道坌出.
나는 草書를 한다.
반드시 心氣가 和平하게 되어 法度에 들어 一波·一磔이라도 堅正하지 아니함이 없게 하여 右軍의 尺度를 잃지 않아야 한다만일 조금이라도 제멋대로 하게 되면 규범에 어긋나고 조처를 고치게 되어 惡道가 坌出한다

米老譏顛素謂但可懸之酒肆 非過論也.
元璋은 張顚과 懷素를 비난하여 다만 그 글씨를 주점에나 걸어둘 만하다라고 말하니 過論은 아니다.

右軍 이후에는 草書가 없다. 먼저 극단적으로 말하여 讀者를 놀라게 하고, 그 다음에 後世의 草書가 邪道임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大令 즉 王獻之를 들어 도저히 父親인 右軍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乃翁은 乃父로 그의 父親을 가리킨다.
已非 復乃翁門仞이란 父親의 門이 높아서 오를 수 없다는 뜻이다.
過庭之訓은 父親의 교훈이다.
『論語』 季氏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陳亢이 伯魚에게 묻기를, 그대도 또한 다른 들음이 있는가? 대답하기를, 다른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일찌기 홀로 서 계실 때 鯉가 추창하여 뜰을 지나니 말씀하시기를 詩經을 배웠느냐? 하시기에 대답하기를, 아직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詩를 배우지 아니하였다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시기에 저는 물러가서 詩經을 배웠읍니다. 다른 날에 또 홀로 서 계시기에 鯉가 추창하여 뜰을 지나니 말씀하시기를 禮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대답하기를, 아직 배우지 못하였읍니다 하니 禮를 배우지 아니하면 서지 못할 것이다 하시기에 저는 물러가서 禮를 배웠읍니다. 이 두가지 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陳亢이 물러가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나를 물어서 셋을 얻었으니 詩를 듣고 禮를 들었으며 또 君子가 그 아들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노라」
이 文中의 「鯉趨而過庭」에서 알 수 있듯이 過庭之訓은 父親의 교훈이다. 庭訓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本文의 의미는 王獻之는 父親인 右軍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도저히 父親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唐의 張旭(生卒不詳)과 懷素(725?∼785?)이후의 狂草를 批判하고 있다.
顚은 張顚 즉 張旭이다. 字는 伯高며 唐의 蘇州人이다. 草書를 잘 썼는데 술을 좋아하여 몹시 취하면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서 썼다. 세상에서 張顚이라고 부름은 미치광이 張旭이란 뜻이다.
素는 懷素이다. 字는 道眞. 唐나라 때 長沙의 僧으로 술을 좋아하고 草書에 뛰어났다.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서 芭無 萬餘그루를 심어서 종이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張旭과 懷素는 狂草의 達人이다.
그 奔騰奇逸의 風은 「놀란 뱀과 질주하는 이무기의 氣勢가 문으로 듦과 같고 소낙비와 회오리바람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짐과 같다.」라고 읊은 詩句를 들어 草書로서는 後世에까지 영원히 특수한 맛을 사람들에게 남겨 놓았지만 草書의 正統이라고는 할 수 없다.
「子敬以下 莫不鼓努爲力 標置成體」의 句는 孫過庭의 『書譜』에 있으며 子敬 즉 王獻之 이후의 書를 非難한 말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王獻之 이후의 書家는 鼓努(기운이 밖으로 드러남)의 書를 筆力이 있다고 하며 標置가 이상한 書를 하나의 書體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어느 것이든 外形만 꾸며서 과시하고 안으로 實力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內不足者 外必張」의 의미이다. 물론 時代는 質朴에서 文飾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草書도 十七帖과 같은 簡朴한 風에서 狂草와 같은 曲藝風으로 옮아감을 멈추게 하지 못하나, 그것만은 아니다. 書家自身이 墮落한 것이라고 虛舟는 後世의 草書를 몹시 비난하고 있다. 이것이 「非直世降風移之故也」의 의미이다.



셋째로, 虛舟의 草書論을 제시하고 있다. 草書에서는 특히 「心氣和平」이 중요하다고 한다. 字形이 자유스러워지려면 그만큼 心氣가 和平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虛舟가 楷書에 있어서 平穩을 부정하고 跌宏한 勢를 강조한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楷書에 있어서 跌若을 取하고 草書에 있어서 和平을 取함은 일종의 逆說이지만 書의 眞理를 파악한 達見이라고 해야 한다.
虛舟는 또 「斂入規矩 使一波一磔 無不堅正」이라고 말한다. 草書야말로 書法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되니, 하나의 波磔이라도 浮滑함이 없이 堅正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철저한 역설임과 동시에 清朝의 狂草書家를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草書는 右軍의 尺度에 따른다는 平凡한 논리에 의거하고 있다.
一縱逸의 一은 만약의 뜻이고 偭은 背이고 錯은 礪石(숫돌)이다. 坌出은 함께 나타난다는 뜻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縱逸하여 규범에 어긋나고 잘 정돈된 右軍의 書法을 고치려는 야심을 가지면 邪道가 모두 함께 나타난다고 한다.
마지막에 米元章의 말을 빌려서 끝맺고 있다.
米老는 米元章이다.
米元章이 張旭과 懷素의 狂草를 비난하여 말한
「그들의 書는 주점의 벽에나 걸어둘 수 있는 글씨다」를 들어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虛舟는 말한다.

2

姜白石論草書
須有起有應各盡義理
愚以爲此只死法耳.
姜白石의 論草書에서
모름지기 일어남이 있고 對應함이 있어 各各은 義理를 다해야 한다.라 함을 나는 다만 死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欲斷還連 似奇反正 不立一法 不舍一法 乃能盡妙夫.
끊어질 것 같으나 도리어 이어지고한 것 같으나 도리어 하며一法도 세우지 않고 一法도 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를 다할 수 있다.

惟右軍必也聖乎
右軍만이 반드시 書聖인져!

姜夔는 字가 堯章이고 號는 白石이다. 宋의 사람으로 배움을 좋아해서 通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특히 音樂과 書에 뛰어났으며 『績書譜』 一卷을 지었다. 本文의 「論草書」는 그 中의 一章이다. 姜白石의 이 말에 대해서 虛舟는 死法일 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白石과 虛舟의 관점이 서로 어긋남에서 초래된 것이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白石의 이 말은 草書에서는 形式上의 照應關系가 合理的으로 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虛舟는 草書의 一氣貫通을 설명하고 있어서 이 둘은 결국 하나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照應의 합리화를 外形에서 설명하면 死法이지만 一氣貫通하여 감흥이 나아가는 대로 活躍하며 또한 臨機應變으로 法에 부합되면 외모도 또한 合理的으로 된다. 이것은 死法이 아니고 活法이다.

 

虛舟가 白石을 비난한 것은 學書者를 警鍾한 것이지 白石을 멸시한 것은 아니다. 虛舟는 草書의 活法을 「欲斷還連 似奇反正 不立一法 不舍一法」의 四句에 두고 있다. 끊어졌는가 여겨지지만 연결된다. 이것은 筆意가 貫通하고 있기 때문이다. 奇異한 것인가 여겨지지만 바르다. 이것은 法을 體得한 奇이기 때문에 奇異하면서도 正을 잃지 않은 것이다.

藝術은 이 점이 중요하다. 一法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法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法을 豫定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의 法도 미리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筆의 躍動은 착실하게 法에 合致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法도 버릴 것이 없다. 즉 하나의 法도 세우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法도 버릴 것이 없다. 만약 하나의 法이라도 세우면 다른 法은 잃게 된다. 이것이 草書의 理想이다. 이리하여 妙를 다할 수가 있다.
「夫惟右軍必也聖乎」는 以上과 같이 活法을 驅使한 사람은 右軍 뿐이고 그러므로 書聖이라는 말이다.

☞ 姜夔(1163 1203): 鄱陽人. 堯章, 白石道人, 白石道人歌曲』 『綱帖平』『續書譜』『詩說등의 著述이 있다.



3

草書如何守正?
草書는 어떻게 을 지키는가?

圓中規方中矩.
은 에 알맞고 은 에 알맞아야 한다.

如何盡變?
어떻게 變化를 다 하는가?

無圓而不矩 無方而不規.
이면서 矩 아님이 없고 이면서 規 아님이 없어야 한다.

如何用力?
어떻게 힘을 쓰는가?

從規矩入 從規矩出.
規矩를 따라 들어가고 規矩에서 나와야 한다.

如何究竟?
어떻게 궁극에 도달하는가?

一步不離 步步縱舍.
一步도 떨어지지 않아 一步一步는 자유롭게 해방되어진다.

至於能縱舍 斯謂從心不踰.
縱舎를 잘함에 이르면 이것을 마음에 따라 해도 을 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右軍化不可爲.
右軍의 조화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其底蘊不過些子.
그 깊은 곳의 蓄積은 조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顛素只此些子差所以永堕異趣.
·는 다만 이 조금 정도의 차이 때문에 영원히 異趣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如何는 方法을 묻는 것이다.
첫째로, 草書에 있어서 正을 지키는 방법은 圓은 정확히 圓으로 하고 方은 정확히 方으로 해야 한다. 결국 圓筆과 方筆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草書이다. 轉할 때는 篆筆을사용하고 折할 때는 隷筆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草書의 根本은 篆隷이다. 이것을 몸에 익힘이 草書의 正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中規·中矩에 관해서는 第6章의 1節에서 설명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둘째로, 草書에 있어서 변화를 다하는 방법은 圓은 모두 矩이고 方은 모두 規이게 함이다. 圓은 곡선인데 그 가운데 矩 즉 직선을 붙인다. 方은 직선인데 그 가운데 規 즉 곡선을 붙인다. 처음에는 規와 矩를 나누어서 몸에 익히는 것을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規와 矩를 함께 익히는 것이다.

 

셋째로, 草書에있어서 힘을 사용하는 방법은 規矩를 따라 들어가고 規矩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경우의 規矩는 方과 圓을 말할 뿐만 아니라 一切의 用筆法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草書는 다만 팔에 맡기고 기분에 맡겨서 써서는 안 되고, 먼저 法에 따라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法을 얻은 후에 法에서 나온다. 法에서 나오면 無法이다. 하지만 法을 몸에 익힌 후의 無法이다.

 

네째로, 草書의 最後의 理想에 도달하는 방법은 論語에서 말하는 「마음의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法度를 넘지 않는다」”는 경지를 향하여 精進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一步不離 步步縱舎」의 상태로 된다. 우리가 걸을 때 一步라도 발은 大地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걸음마다 大地에서 자유롭게 해방된다. 그것이 步行이다. 그와 같이 書法의 學習도 一法이라도 그것을 얻지 못하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一法을 얻으면 그것을 버려버린다. 그러므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法을 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마음의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서 해도 法을 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할 수가 있다.


마지막에서 右軍의 草書를 칭찬하고 張旭과 懷素를 비난하면서 글을 끝맺고 있다.
右軍의 草書가 變化自在함은 도저히 後人이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不可爲란 不可能이란 의미이다.
底蘊이란 文字는 書에서 아주 적절한 말이다. 蘊은 積이라는 뜻이다. 底蘊은 깊은 곳에 축적됨이다. 私心이 없는 無心의 상태에서 蘊이 나타난다. 底蘊은 微少한 것이다. 거의 微微한 것의 質에 의해서 右軍과 같은 변화가 나타난다.
張旭이나 懷素와 같은 狂草派들은 그 조금 정도의 質이 右軍과 차이가 있다. 그 때문에 영원히 後世에까지 이상한 草書로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本章의 第1節에서도 米元章의 말을 引用하여 張旭과 懷素를 비난하고, 本節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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