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第12章 論古(논고) 본문
1
鍾太傅書以唐摸賀捷表爲第一.
鍾太傅의 書는 唐摸의 賀捷表를 第一로 여긴다.
幽深古雅 一正一偏 具有法外之妙.
幽深하고 古雅하여 한편으로는 正鋒이고 한편으로는 偏鋒으로 法外의 玄妙함을갖추고 있다.
力命表摸榻失真 了乏勝概.
力命表는 摸榻으로 眞實을 잃어 결국 훌륭함이 없다.
季直乃是偽跡 了乏賀捷勝概不足觀也.
季直은 僞跡으로 결국 賀捷이 지니는 훌륭함이 없어 볼 가치가 없다.
論古에서는 法書로 간주되는 古名跡의 考證과 評論을 하고, 아울러 學書者에게 提言하고 있다.
法書의 評論에 관해서는 古來로 많은 學者들의 異見이 있다. 그러므로 本書는 虛舟의 思想을 상세히 전달함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文意를 충실히 해설하고 그친다.
따라서 讀者에게 虛舟의 사상에 의심되는 바가 있으면 다른 書品論에 관해서 깊이 연구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본문을 해석해 보자.
鍾瑤의 書로 일컬어지는 것에 몇 종류가 있지만 唐摸의 『賀捷表』를 제일로 여긴다.
虛舟는 이것을 評하여 幽·深·古·雅의 네 字를 들고 있다.
一正一偏이란 正이기도 하고 偏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用筆의 正과 偏이다. 즉 正鋒과 偏鋒을 말한다. 正鋒은 筆劃의 兩面이 동등하게 되도록 鋒을 사용하는 것이고 偏鋒은 鋒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여 表裏를 나타내는 것이다.
『賀捷表』는 鋒의 正偏을 교묘히 사용하여 無限의 변화를 일으키고 法外의 玄妙함이 있다고 한다.
『力命表』는 摸榻과 拓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眞象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훌륭한 점이 없다고 한다. 勝概의 概는 分量이다.
『薦季直表』는 僞跡이지 鍾繇의 作品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단정하고 있다.
賀捷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볼 가치가 없다.
2
右軍臨鍾 墓田爲勝 然比於賀捷 十得二三耳.
右軍은 鍾繇의 書를 臨함에 墓田을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나 賀捷과 比較하면 10에서 二三만을 얻을 뿐이다.
宣示非不古雅 然鋒頹穎禿 未屆神妙 當由摸榻失真故.
宣示는 古雅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鋒이 무너지고 붓끝이 무지러져서 神妙함에는 이르지 못하니 당연히 摸榻으로 眞實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右軍은 鍾徭의 書를 보고 감탄하여 종요의 書를 많이 臨書했는데 『墓田丙舎帖』을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나 墓田은 賀捷에 비교하면 10 가운데 二나 三을 얻을 정도라고 한다.
『宣示表』는 古雅하지 않음이 없으나, 鋒의 作用이 무너지고 鋒先이 무지러졌기 때문에 神妙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한다. 摸榻을 되풀이해서 眞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鍾瑤를 마친다.
3
右軍楷書 以新安呉氏所藏樂毅論爲最.
右軍의 楷書는 新安의 吳氏가 所藏한 樂毅論을 最高로 여긴다.
似柔而剛 似近而遠 神清韻和 使人有天際眞人想.
溫柔한 듯하면서 剛健하고 卑近한 듯하면서 深遠하며 神韻이 清和하여 사람이 天上의 眞人을 생각케 한다.
高紳學士家不全本 雖名流傳有緒 亦已不屆精華矣.
高神學士家의 不全本은 비록 名流가 傳한 계통이 있는 것이지만 이미 精華에는 이르지 못한다.
右軍의 楷書 가운데에서 『樂毅論』을 제일로 여김은 諸家의 일치된 의견이지만 그 摸榻이나 拓本의 優劣에 관해서는 論議가 많다.
虛舟는 明의 新安의 呉廷1)이 所藏했던 『絹素重寫本』을 최고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餘清齋本에 刻되어 있고 精彩를 띠고 있다.
1) 呉廷(生卒未詳) : 明 新安人, 字는 用卿, 號는 江村. 書畵商人이다. 『餘清齋帖』
虛舟는 評하여 말하기를 「柔한 듯하면서 剛하고 近한 듯하면서 遠하다」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柔의 가운데에 剛을 붙이고 近의 가운데에 遠을 붙이고 있다는 뜻이다. 近은 卑近이며 通俗이다. 遠은 高遠이나 深遠이며 高雅이다.
「神清韻和 使人有天際眞人想」은 그 神韻이 天上의 仙人을 接한 듯이 느끼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唐의 孫過庭은 『書譜』에서 『樂毅論』을 評하여 「樂毅를 臨하면 感情은 佛鬱(불만이나 불평이 있어 마음이 끓어 오르고 답답함)함이 많다」2)라고 말하고 있다.
2) 『書譜』에 「寫樂毅則 情多佛鬱」란 글이 있다.
다음에 「高紳學士家의 不全本」에 관하여 설명해 보자.
樂毅論의 原石은 太宗과 함께 昭陵에 묻혔지만그 후에 溫韜가 發掘하여 이것을 얻었는데 宋初에 이르러 그 原石이 學士 高紳의 손에 들어갔다.
高紳은 이것을 鐵로 묶어두었지만 결국 돌이 깨어져서 殘石의 가장 왼쪽 줄 아래에「海」의 한 字가 남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것을 海字本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高紳學士의 不全本이다. 이것은 有名人에 전해져서 근거있는 것이긴 하지만 현재에는 精彩가 없다고 虛舟는 말한다.
4
世俗所傳晋唐小楷質木無潤 如出一手.
世俗에 傳하는 晋唐의 小楷는 質朴하나 潤澤함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越州石氏刻烜赫 殆數百年 究亦精華銷乏.
越州石氏의 刻은 名聲이 높긴 하지만 거의 數百年이나 되어서 결국 精華는 사라져 버렸다.
無古人撒手懸崖妙處.
古人이 손을 懸崖에 휘두름과 같은 妙處가 없다.
世俗에 流傳하는 晋唐의 小楷는 摸榻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質朴함은 있지만 潤澤한 맛은 없다.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보인다.
越州石氏本은 宋拓으로서의 權威를 갖고 있었으며 그 후의 集帖의 原本으로 되었기 때문에 他本보다는 명성이 높지만 결국은 精彩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古人撒手 懸崖妙處」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撒은 揮이며 揮毫이다. 古代의 書란 비교적 小楷이지만 懸崖에 大字를 揮毫함과 같은 너그럽고 웅장한 妙處가 있다. 현재 世俗에 보이는 晋唐의 小楷에는 이와 같은 너그러운 맛이 없다고 虛舟는 말한다.
第8章 3節에 「蠅頭의 細書를 쓸 때에도 반드시 筆勢를 紆餘跋宕하게 하고 尋丈의 勢가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이런 의미이다.
5
余得古榻洛神賦全本 篆隷楷行草皆備 眞是有妙畢見無美不臻.
내가 얻은 古榻洛神賦의 全本은 篆·隷·楷·行·草를 모두 갖추어서, 진실로 玄妙함이 모두 나타나 아름다움이 이르지 않음이 없다.
次惟毘陵唐氏所藏十三行 駘宕腴潤 猶有游行自在之趣.
다음으로는 毘陵의 唐氏가 所藏한 十三行이다. 駘宕하고 살찌고 潤澤하여 마치 游行自在의 맛이 있는 것 같다.
賈秋壑玉版本則神明渙散 不足取則.
賈秋壑의 玉版本은 精神이 散逸하여 法則으로 取하기에는 不足하다.
而世皆寶之貴耳賤目 吾所未喩.
그런데 世人이 그것을 보배로 여겨서 귀를 貴하게 여기고 눈을 賤하게 여기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王虛舟가 入手한 古榻의 洛神賦全本은 篆·隷·楷·行·草의 用筆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한다.
書의 妙味는 하나의 體에 各體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楷書같은 楷書 草書같은 草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妙畢見이란 妙趣가 極限까지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無美不臻이란 모든 아름다움이 到來한다는 의미이다.
虛舟가 본 洛神賦는 自身이 所藏한 것이 최고이고, 그다음이 毘陵의 唐氏所藏의 洛神十三行이라고 한다.
駘宕은 駘蕩과 같다. 悠悠自適하고 廣大한 모양이다.
腴潤은 살이 찌고 기름기가 번들번들한 모양이다.
游行自在는 고기가 水中에서 自由自在로 헤엄친다는 말이다.
셋째가 賈秋壑의 玉版本十三行인데, 이것은 精神이 散逸해 버렸으매 法則으로 할 수 없다. 그런데도 世間에서는 이것을 보배로 여긴다.
그렇게 말함은 他人의 평가를 尺度로 삼기 때문이다. 귀를 貴하게 여긴다고 함은 他人의 말을 중시함이고, 눈을 賤하게 여긴다고 함은 자기의 眼識을 믿지 못함이다. 「吾所未喩」는 자기는 「世皆寶之貴耳賤目」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6
右軍十七帖爲草書之宗.
右軍의 十七帖은 草書의 宗이다.
唐摸墨跡 萬曆間藏邢子愿家 刻石來禽館 爲有明十七帖之冠.
唐摸의 墨跡은 萬曆의 사이에 邢子愿의 집에 所藏되었으며, 來禽館法帖에 刻石되어서 明代 十七帖의 으뜸이 되었다.
子敬則已縱至於顛素 則奔逸太過 去右軍風流益以遠矣.
子敬은 매우 放縱하고 張旭과 懷素에 이르러서는 奔逸함이 매우 지나쳐서 右軍의 風流와 거리가 더욱 멀다.
王右軍의 十七帖은 草書의 宗家라고 해야 한다.
그 후의 많은 草書가 十七帖에서 分派하여 나오고 있다.
唐摸의 十七帖의 墨跡은 明의 萬曆年間(1600年경)에 邢侗의 집에 所藏되었으며, 來禽館法帖3)에 刻石되었다. 來禽館法帖은 邢侗이 萬曆二十年에 摸刻한 것으로 지금은 그 全巻을 볼 수 없으나, 右軍의 十七帖은 第二冊에 실려 있다.
이것이 明代 最高의 十七帖이라고 한다.
有明은 明나라를 일컫는다.
王獻之는 羲之의 아들이지만 매우 放縱한 一面이 보이고, 唐의 張旭이나 懷素에 이르러서는 奔騰逸脫함이 매우 甚하다. 그래서 右軍의 遺風餘流는 더욱 멀어졌다.
3) 來禽館法帖 : 全三卷, 歷代叢帖(1600年경 侗의 집에 소장)
第一卷 『蘭亭序』 三種, 索靖 『出師表』, 『黃庭經」, 『西園雅集圖記』
第二卷 王羲之 『十七帖』
第三卷 『澄清堂帖』
7
魏晋人書一正一偏縱橫變化了乏蹊逕.
魏晋人의 書는 한편으로는 正鋒이고 한편으로는 偏鋒이며, 縱橫으로 變化하여 지름길이 없다.
唐人斂入規矩 始有門法可尋 魏晉風流一變盡矣.
唐人은 法度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門法을 찾을 수 있으나, 魏晋의 風流는 一變하여 모두 없어져 버렸다.
然學魏晋 正須從唐人乃有門戸.
그러니 魏晋을 배우려면 반드시 唐人을 따름에 문호가 있다.
魏晋人의 書는 「一正一偏」이라고 한다. 「一正一偏」은 正鋒을 使用하기도 하고 偏鋒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用筆이 縱橫自在로 변화한다.
蹊는 小道이고 逕은 直路(지름길)이다. 魏晋人의 書는 변화가 풍부하기 때문에 法則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唐人은 法度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入門하는 法을 찾을 수 있다. 唐에 이르러 魏晋의 風流는 一變하여 사라져 버렸다.
즉 魏晋人은 韻을 중요시하고 唐人은 法을 중요시하며 宋人은 意를 중시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지름길이 없는 魏晋人의 書에서부터 入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法이 있는 唐人의 書에서부터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길이 있다고 虛舟는 말한다.
8
有唐名家各欲打破右軍鐵圍 自立門戸 所謂皆有聖人之一體.
唐의 名家는 각자 右軍의 鐵圍를 打破하려고 하여 스스로 門戶를 세웠으니, 이른바 ‘모두가 聖人의 一體가 있음’이다
然各能以其一體精詣其極 不似後人意滿手滑 竭盡氣力 無有至處.
그리하여 각자는 그 一體로써 그 極에 정교하게 이를 수 있었으니, 後人의 뜻은 充滿하나 손은 미끄러져서 氣力을 다해도 至極한 곳에 이르지 못함과는 같지 않다.
唐의 名家는 각자 右軍의 法을 打破하려고 하여 자신이 一家의 門戸를 세웠다.
鐵圍란 堅固한 法을 말한다. 門戶도 역시 法이다. 그들은 모두 後人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書體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唐나라 이후의 사람들은 뜻은 充滿하만 손은 미끄러져서 氣力을 다해도 妙處가 없다.
聖人은 王右軍을 가리킨다.
唐의 名家는 右軍의 一面을 갖고 있다고 虛舟는 말한다.
9
古人言
虞書內含剛柔 歐書外露筋骨.
古人이 말하였다.
「虞世南의 書는 안에 剛柔를 함유하고 歐陽詢의 書는 밖에 筋骨을 드러낸다」
君子藏器以虞爲優 然學虞不成 不免精散肉緩 不可收拾.
君子는 器를 감추기에 虞世南을 우수하다고 여기나, 虞世南을 배워서 이루지 못하면 정신은 흩어지고 肉이 풀어짐을 면치 못해서 수습할 수가 없다.
不如學歐 有墻壁可尋.
그러므로 歐陽詢을 배워서 墻壁을 찾음만 못하다.
이 古人의 말은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의미는 명백하다.
「虞世南4)의 書는 內部에 剛柔를 함유하고 歐陽詢의 書는 外部에 筋骨을 드러낸다.」
군자는 재능을 깊이 감추어 밖에 드러내지 않는다. 유능한 매는 발톱을 감춤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歐陽詢보다는 虞世南의 편이 맛이 더 깊다.
虞世南의 글씨를 공부함에 外部에 精力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흩어져 버리고 또 외부에 筋骨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肉이 池緩해 버리게 되어 虞世南을 배워서 성공할 수 없다면 法則이 확실한 歐陽詢을 배우는 것이 낫다.
墻壁이란 흙담이며 境界이다. 「有墻壁可尋」이란 찾을 수 있는 書法이 있다는 뜻이다. 虞世南에는 찾을 수 있는 書法이 확실치 않지만 歐陽詢에는 많이 있다는 뜻이다.
4)虞世南: (558~638) 越州 余姚人. 字는 伯施. 書跡으로 『孔子廟堂碑』, 『破邪論」, 『昭仁寺碑』, 『積年帖』, 『論道帖』
10
虞得右軍之圓 歐得右軍之卓 褚得右軍之超 顔得右軍之勁 柳得右軍之堅.
虞世南은 右軍의 圓을 얻었고, 歐陽詢은 右軍의 卓을 얻었고 褚遂良은 右軍의 超을 얻었고 顔眞卿은 右軍의 勁을 얻었고, 柳公權은 右軍의 堅을 얻었다.
正如孔門四科 不必兼擅而各詣所長 皆是尼山血派.
이것은 바로 孔門의 四科와 같으니, 두루 잘하지는 못하나 각각 長處에 이르렀으니, 모두가 尼山의 血派이다.
虞世南은 右軍의 圓을 얻었다. 圓은 圓融으로 모가 나지 않음을 말한다.
歐陽詢은 右軍의 卓을 얻었다. 卓은 卓然으로 뛰어나서 의젓한 모양이다.
褚遂良은 右軍의 超를 얻었다. 超란 格式에 구애받지 않고 超脫함을 말한다.
顔眞卿은 右軍의 勁을 얻었다. 勁은 筋骨이 굳셈이다.
柳公權은 右軍의 堅을 얻었다. 堅은 堅忍不拔(굳게 참아 뜻을 옮기지 아니함)의 뜻이다.
이상 다섯 사람의 名家와 右軍에 대한 관계는 孔門의 高弟들과 孔子에 대한 관계와 같다.
孔門의 四科에 대해서는 論語 「先進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德行에는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
言語에는 宰我·子貢,
政事에는 冉有·季路,
文學에는 子游·子夏」.
이것을 본받아서 虞·歐·褚·顔·柳의 다섯 名家를 右軍의 四科로 간주한 것이다.
「不必兼壇」이란 반드시 두루 겸해서 잘하지는 못했다는 뜻이고
「各詣所長」이란 五家는 각각 자기가 잘하는 점에 있어서 造詣가 깊다는 뜻이다.
「尼山血派」에서 尼山은 孔子이고 血派는 孔子의 血을 받아서 派를 달리했다는 뜻이다.
11
學褚須知其沈勁 學歐須知其跌蕩 學顔須知其變化 學柳須知其娬媚.
褚遂良을 배움에는 그 沈勁을 알아야 하고, 歐陽詢을 배움에는 그 跌蕩을 알아야 하고, 顔眞卿을 배움에는 그 變化를 알아야 하며, 柳公權을 배움에는 그 斌媚를 알아야 한다.
沈勁은 沈着하여 勁健함이다.
王虛舟는 沈勁을 書의 第一義로 여겼다.
따라서 褚遂良을 배우는데 특히 이 말을 사용함은 褚遂良을 배울 때 종종 娬媚에 기울어지기 때문에 沈勁을 든 것이다.
跌蕩은 規範을 넘어서 躍動함이다. 歐陽詢을 배울 때 종종 整齊에 그치므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미에서 跌蕩을 든 것이다.
顔眞卿을 배울 때 종종 단조롭게 되므로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뜻에서 변화를 든 것이다.
娬는 嫵이니, 娬媚는 여자의 아름다움이다.
柳公權을 배우면 木訥(質朴하고 遲純함)하여 無味하기 쉬우므로, 특히 娬媚를 든 것이다.
12
古人藁書最佳以其意不在書 天機自動往往多入神解.
古人의 藁書가 가장 훌륭함은 그 意圖가 書에 있지 않으므로, 天機가 스스로 움직여서 왕왕 神解에 듦이 많기 때문이다.
如右軍蘭亭魯公三藁 天真爛然莫可名貌.
右軍의 蘭亭과 魯公의 三藁 따위는 天眞爛然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有意爲之 多不能至 正如李將軍射石没羽 次日試之便不能及.
意圖를 가지고 글씨를 쓰면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바로 李將軍이 돌에 활을 쏘아 화살의 날개 부분까지 깊이 박혔으나 다음날 다시 시도했으나 미칠 수 없었음과 같다.
此有天然 未可以智力取已.
여기에 天然이 있으니 智力으로써는 取할 수 없다.
古人의 書가운데 書가 가장 아름답다. 藁는 藁이며 稿이고, 稿本은 초안이다. 따라서 稿書는 초안의 筆跡이다. 藁書는 그 뜻이 書에 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 경우의 意는 意圖이다.
文章에 意圖가 있고 書에 意圖가 없다.
書에 意圖가 없기 때문에 天機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機란 활의 방아쇠로 이것을 당겨서 활을 쏘는 것이다.
곧 모든 작용을 발동시키는 그것을 말한다. 人意를 초월한 機를 天機라 한다. 天機이기 때문에 스스로 작용한다.
神은 精神이며 精神은 個個를 초월한다. 따라서 神解란 個個를 초월한 判斷이다. 天機이기 때문에 神解로 된다. 魯公의 三稿란 爭座位稿·祭姪稿·祭伯稿이다.
右軍의 蘭亭과 함께 天眞爛然한 것이며 形容할 수 없는 神品이다.
만약 意圖가 있었다면 이와 같은 妙는 얻지 못했을 터이다.
唐의 何延之의 『蘭亭記』에 의하면 右軍이 神助를 얻어 蘭亭叙를 썼다. 그 후에 여러 번 써 보았으나, 이 稿本보다 훌륭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神助란 天機自動이다. 天機自動을 설명하는데 虛舟는 李將軍의 射石沒羽의 故事를 인용하고 있다. 「李將軍이란 사람이 자기의 어린애가 범에 물려 죽었기 때문에 어느 날 강한 활을 메고 범을 찾아 山野를 돌아다녔다. 그러자 眼前에 범이 나타났다. 李將軍은 곧바로 활을 쏘아 命中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범이 아니고 岩石이었다. 화살이 돌을 뚫어 깃까지 깊이 묻혔다. 一念이 응겨서 돌을 뚫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다음날 또 시도했지만 화살은 돌을 뚫지 못했다」5)고 하는 故事이다.
5) 『史記列傳」巻 109 李將軍列傳에 廣出獵 見草中石 以爲虎而射之 中石没鏃 視之石也 因復更射之 終不能復入石矣」란 글이 있다.
「此有天然」이란 天機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神助는 智力으로써는 도저히 얻어질 수 없다.
13
虞褚離紙一寸 顏柳直透紙背.
虞와 褚는 종이에서 조금 떨어지고 顔과 柳는 바로 종이 뒤를 뚫는다.
惟右軍恰好到紙.
오직 右軍만이 알맞게 종이에 이른다.
然必力透紙背 方能離紙一寸 故知虞褚顏柳 不是兩家書.
그러나 반드시 힘이 종이 뒤를 뚫어야만 종이에서 조금 떨어질 수 있으므로 虞褚와 顔柳는 兩家의 書가 아님을 안다.
至筆力恰好到紙 則是天工至 人巧錯 天地和明之氣 絪縕會萃於指腕之間 乃能得之 有數存焉而已.
筆力이 알맞게 종이에 이르면 곧 天工이 이르고, 人巧는 멈추고 天地의 和明한 기운이 指腕의 사이에 서로 합하여 어리고 모여서야 얻을 수 있으니 命數가 여기에 있을 따름이다.
盧世南과 褚遂良의 書는 離紙, 顔眞卿과 柳公權의 書는 透紙라고 한다. 一寸은 조금 정도이다.
離紙란 筆이 종이에서 떨어져서 공중에서 飛動旋回함이고 透紙란 筆力이 紙背를 뚫는다는 뜻이다.
한편은 높이 나는 筆이고 한편은 깊이 가라앉는 筆이므로 正反對이다. 그리고 虞世南과 褚遂良은 離紙에 기울고 顔眞卿과 柳公權은 透紙에 기울지만 그 中庸을 얻은 사람은 右軍이라고 한다.
恰好란 꼭 알맞다는 뜻이다. 즉 中庸의 意味로 해석함이 좋다.
右軍은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筆이 종이에 알맞게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恰好到紙를 얻지는 못한다.
먼저 透紙를 충분히 익혀서 筆力을 쌓은 후에 離紙를 배운다.
이것이 순서이니 虞褚의 離紙나 顔柳의 透紙는 결국 하나이다. 이것이 兩家의 書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離紙와 透紙를 배워서 右軍과 같이 恰好到紙의 경지에 이르면 天工이 이르고人巧는 멈춘다.
天地의 和明한 氣가 합하여 指의 사이에 모인다고 함은 무엇인가?
絪縕은 萬物生成의 元氣가 盛하게 어리는 모양이다. 天地에는 잘 어울리는 元氣로 充滿해 있고 이 氣가 있어서 萬物이 生成한다.
그 氣가 있어서 天工이 있고 그 氣를 누려서 人工이 天工에 참여한다. 이는 『書經』 大禹謨의 「天工人其代之(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한다)」라는 말이다. 書에서 이 氣가 指腕의 사이에 모이면 人間의 技巧를 벗어나서 天工에 나아갈 수 있다.
數는 命數이며 先天的 素質이다. 따라서 右軍처럼 天工에 이름은 素質에 따르지 노력해서 도달하지 못한다.
透紙와 離紙에 관해서는 劉熙載가 按과 提라는 두 字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書家는 提按의 두 字를 함께 생각하여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用筆의 무거운 곳은 가벼이 드는 듯이 하고 用筆의 가벼운 곳은 반드시 눌러야 한다. 그래야만 무너지고 날리는 두 개의 病을 免할 수가 있다.」6) 여기서 提筆은 離紙의 筆이고 按筆은 透紙의 筆이다. 이 두 筆을 따로따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함께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用筆의 무거운 곳은 도리어 가벼이 들고 用筆의 가벼운 곳은 도리어 눌러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按筆은 墮筆이 되지 않고 提筆은 飄筆이 되지 않는다.
6)劉熙載 『書概』 用筆論 「書家於提按兩字 有相合而無相離 故用筆重處正須飛提 用筆輕處正須實按 始能免堕飄二病」
14
右軍平生神妙 一巻蘭亭宣洩殆盡.
右軍 平生의 神妙함은 한권의 蘭亭에 거의 다 表現되어 있다.
聖教有蘭亭之變化 無其專謹 有蘭亭之朗徹 無其遒厚.
聖教에 蘭亭의 變化는 있으나 그 한결같음은 없고 蘭亭의 明朗洞徹함은 있으나 遒勁敦厚함은 없다.
無美不臻 莫可端倪 其惟禊帖乎 具體而微厥惟聖教.
아름다움이 이르지 않음이 없어 처음과 끝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禊帖 뿐이며 體를 갖추어 微妙한 것은 오직 聖敎뿐이다.
從聖教學蘭亭 乃有入處.
聖敎를 따라서 蘭亭을 배움에 들어가는 곳이 있다.
右軍 平生의 神妙함은 書의 神妙함을 말한다. 右軍의 書의 實力은 蘭亭 한 권에 모두 表現되어 있다고 한다.
宣洩이란 설명이나 표현이란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蘭亭叙와 集字聖敎序를 비교하고 있다.
聖敎에는 蘭亭의 변화는 있지만 蘭亭의 한결같음은 없고 蘭亭의 明朗洞徹함은 있지만 蘭亭의 遒勁敦厚함은 없다.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변화가 무궁한 것은 蘭亭이다.
또 各種의 體를 갖추어 微妙한 것은 聖敎序라고 한다.
따라서 聖敎를 배우고 나서 蘭亭을 배우면 무리없이 右軍의 法에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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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褚從隸來 顏柳從篆來.
歐와 褚는 隸書에서 나왔고 顔과 柳는 篆書에서 나왔다.
歐陽詢과 褚遂良의 用筆은 隷筆에서 나왔고 顔眞卿과 柳公權의 用筆은 篆筆에서 나왔다고 한다.
歐와 褚는 王右軍을 배우고 아울러 北碑를 배워서 一家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隷筆이 主를 이루고 鋒이 드러나 날카로운 맛이 있다. 이에 反해서 顔은 篆筆이 主를 이루고 渾厚의 맛이 있다.
顔은 褚를 배웠지만 篆書를 李陽氷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用筆에 있어서 師風을 벗어 버렸다. 柳는 顔을 배웠기 때문에 篆筆을 얻었을 뿐이다.
16
褚公書 人以爲微至 吾以爲沈雄.
楮公의 書를 사람들은 微至하다고 하나 나는 沈雄하다고 생각한다.
非洗刷到骨盡去渣滓 那得屆此清虛境界?
씻고 긁어서 骨에 이르도록 찌꺼기를 다 제거하지 않으면 어찌 이 清虛의 境界에 이를 수 있는가?
宋人以爲顔出自褚此理可悟.
宋人은 顔이 褚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褚遂良의 書는 일반적으로 微至하다고 여겨진다. 微至란 巧緻微妙의 뜻이다. 그것을 어느 면에서 인정할 수는 있지만 褚의 특징은 沈雄이라고 虛舟는 말한다.
沈은 浮의 반대이고 筆鋒이 깊이 숨음을 말한다. 雄은 男性的인 氣魄으로 勁健함을 말한다.
沈雄은 骨力이 좋지 못하면 얻을 수 없다. 褚의 武人다운 面目은 이런 점에 있다.
洗刷란 남에게서 배운 것을 씻어내고 긁어내는 것이다. 骨에까지 이른다고 함은 더이상 洗刷할 수 없는 곳까지 洗刷한다는 의미이다. 남에게서 배운 것을 완전히 洗刷하면 찌꺼기가 없어진다. 書는 自己의 眞面目을 발휘함에 가치가 있다. 이것에는 學習과 模倣에 의해서 붙은 찌꺼기를 모두 제거해야만 순수성을 발휘할 수 있다.
渣滓가 없어지면 清虛의 경지가 전개된다. 褚書에 보이는 清虛는 沈雄의 지극한 곳에서 얻은 것이다.
虛舟는 종종 題跋의 가운데 「沈勁의 極에서 찌꺼기가 없어져 清虛가 나온다」라고 말한다.
17
褚河南書 陶鑄有唐一代.
褚河南의 書는 唐一代를 陶鑄한다.
稍嶮勁則爲薛曜 稍痛快則爲顔真卿 稍堅卓則爲柳公權 稍纖媚則爲鍾紹京 稍腴潤則爲呂尚 稍縱逸則爲魏栖梧 不失尺寸則爲薛稷,
조금 험하고 굳센 것은 薛曜7)이고, 조금 痛快한 것은 顔眞卿이며, 조금 堅卓한 것은 柳公權이고, 조금 가늘고 아름다운 것은 鍾紹京8)이며, 조금 살이 쪄서 潤氣있는 것은 呂尙9)이고 조금 방종한 것은 魏藁梧10)이다. 尺寸을 잃지 않은 것은 薛稷11)이다.
7) 薛曜(生卒未詳) : 唐 蒲州扮陰人. 薛稷의 從兄. 書跡으로는 『封祀壇碑』, 『夏日游石淙詩」
8)鍾紹京(生卒未詳) : 唐 虔州人. 字는 可大. 鍾繇의 十世孫. 書碑로는 『昇仙太子碑』, 『靈飛經」, 『遁甲神經』등이 있다.
9)呂尙(生卒未詳) : 唐 涇州人. 字는 子回. 書跡으로는 『述聖頌』 등이 있다.
10)魏藁悟(生卒未詳) : 魏栖梧라고도 한다. 『善才寺碑』(文蕩律師塔碑, 開元十三年)의 書者로 알려진 인물로 碑文에 官名이 著作郞이라고만 되어 있을뿐 자세한 傳記는 알 수 없다. 魏徵의 子孫이라는 설이 있지만 분명치 않다.
11)薛稷(649∼713) : 蒲州扮陰人. 字는 嗣通. 魏徵의 外孫. 書跡으로는 『昇仙太子碑』, 『信行禪師碑』, 『杳冥君碑』,『龍門山涅槃經』 등이 있다.
褚遂良의 書는 唐 400年의 書를 陶鑄한다. 陶鑄란 陶工이 陶器를 만들고 鍛工이 쇠를 녹여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이 여러가지 물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褚 이후의 書는 모두 楮法을 배워서 1家를 이룬다. 따라서 褚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王虛舟의 견해이다.
「稍」는 褚와 비교해서 조금 기울어진다는 뜻이다.
顔眞卿도 褚를 배웠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最後에 薛稷을 들어 「稍」라 하지 않고 不失尺寸이라고 함은 薛稷의 書에 褚法이 가장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18
柳誠懸臨蘭亭無復一點右軍法.
柳誠懸이 臨한 蘭亭은 한점도 右軍의 法이 없다.
此所謂善學柳下惠者也.
이것이 이른바 ‘柳下惠를 잘 배움’이다.
至其自書蘭亭詩則風韻滯俗不堪嚮近矣.
그가 스스로 쓴 『蘭亭詩』에 이르면 風韻이 俗에 막혀서 가까이 가서 볼만한 것이 없다.
山谷云
子弟凡百可醫 惟俗不可醫.
山谷은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지만 俗만은 치료할 수 없다」
宜爲深戒.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한다.
柳公權이 臨書한 蘭亭에는 전혀 右軍의 法이 없다.
右軍을 臨해서 右軍의 法이 없음은 魯男子가 柳下惠를 잘 배웠다는 것과 비슷하다.
魯男子에 관해서는 第5章 臨古의 末文에서 설명했으므로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公權이 自書한 蘭亭詩를 보면 마치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다. 風韻이 俗調에 막혀 가까이 가서 볼만한 것이 없다.
黃山谷은 말하였다.
「學書者에게는 무엇인가 病弊가 있다. 그것은 지도에 의해서 고쳐진다. 그러나 俗이라는 것만은 치료될 수 없다.」
깊이 경계해야할 말이다.
讀者는 직접 公權의 臨蘭亭과 自書蘭亭을 잘 관찰해보기 바란다.
19
釵脚漏痕之妙 魏晋以來名能書者 人人有之 至顔魯公 始爲宣洩耳.
釵脚ᆞ漏痕의 妙는 魏晋以來로 能書로 이름난 사람은 모두 그것을 갖추고 있었으나 顔魯公에 이르러 비로소 表現되었을 뿐이다.
匪直魏晋 自秦漢來篆隷諸書未有不具此妙者.
다만 魏晋만이 아니라 秦漢以後 篆隷의 모든 書도 이 妙를 갖추지 않은 것은 없다.
學者不解此法便不成書.
배우는 사람이 이 法을 이해하지 못하면 곧 훌륭한 書를 이룰 수 없다.
釵脚ᆞ漏痕에 관해서는 第2章 運筆에서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한다.
運筆의 비유인 折鉸釵ᆞ屋漏痕의 妙는 魏晋이래의 能書家로 불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것을 갖추고 있다.
다만 안진경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 말을 설명했던 것이다.
魏晋의 名家뿐만이 아니라 秦漢 이래의 篆隷의 諸書에도 이 運筆의 妙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
書를 배우는 사람은 이 法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훌륭한 書를 이룰 수가 없다고 虛舟는 말한다.
運筆이란 後世로 내려오면 그만큼 설명이 많아진다. 그것은 書를 공부함에 매우 유익하지만 古代에도 그 實體가 있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名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法이 있다. 설명은 解說에 지나지 않는다.
20
文至昌黎 詩至子美 書至魯公 皆獨擅一朝之勝 正以妙能變化耳.
文은 昌黎에, 詩는 子美에, 書는 魯公에 이르러 모두 唐代의 가장 높은 곳을 독점한 것은 바로 妙로써 잘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世人但以沈古目之門外漢語.
世人이 古典에 沈潛하였다고만 指目함은 門外漢의 말이다.
文은 韓退之가 唐朝의 美를 獨擅하고 詩는 杜甫가 唐朝의 美를 獨擅하고 書는 顔眞卿이 唐朝의 美를 獨擅했다고 한다.
그것은 妙手로써 師法을 변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世人은 이 세 사람을 들어 古意에 깊이 들어갔다고만 여기니, 門外漢의 말이다.
前에는 唐一代의 書를 褚遂良이 陶鑄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顔眞卿을 唐一代의 第1人者로 여기고 있다. 모순인 듯하지만 모순이 아니다. 前에는 書法에 관해서 말했고 여기서는 書品에 관해서 말하였다.
21
李北海張司直蘇武功皆原本子敬.
李北海12) ,張司直13) ,蘇武功14)은 모두 子敬에 根本을 두고 있다.
然吾謂司直勝北海 以其風神淡遠爲不失山陰規格也.
그러나 나는 司直이 北海보다 낫다고 여기나니, 그 風神이 淡白하고 高遠하여 山陰의 規格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北海惟岳麓寺碑淵渾有風骨 雲麾碑則鼓努奔驚奔 氣質太重 學之不已 便入俗格.
北海는 岳麓寺碑만이 淵渾하고 風骨이 있을 뿐이고, 雲麾碑는 鼓努하고 驚奔한 모양으로 氣質이 매우 무거워서, 그것을 배우며 그치지 않는다면 곧 俗格에 들어간다.
至蘇武功 體肥質濁又在北海下矣.
蘇武功에 관하여 말하자면, 體는 살찌고 質은 濁하여 北海보다도 아래에 있다.
王獻之에 근원을 둔 三家를 들어 그 書品을 論하고 있다.
風神이란 高尚한 精神의 움직임을 말하고 淡遠은 淡白하고 高遠한 것을 말한다.
山陰의 規格이란 王右軍의 法을 말한다.
淵渾은 深淵하고 渾朴함이다.
風骨은 高尚한 骨氣를 말한다.
鼓努란 힘을 밖으로 드러냄이고 驚奔은 말이 놀라서 달아남과 같은 外貌의 거침을 말한다.
외모가 거칠고 기질이 무거움은 風神淡遠의 反對이므로 이것을 배워 나가면 俗格으로떨어진다.
12) 李北海(678∼747) : 唐 楊州江都人. 字는 泰和 또는 修穆. 名은 邕. 書跡으로는 『雲麾將軍李思訓碑』, 『麓山寺碑』, 『李秀碑』 등이 있다.
13) 張司直(生卒未詳) : 唐 吳郡人. 名은 從申. 進士에 올라 大理司直에 이름. 『李玄 靜碑』, 『銅牙鎭福興寺碑』 등의 書跡이 있다.
14) 蘇武功(生卒未詳) : 蘇靈芝라고도 한다. 武功(陝西省)人 官은 易州錄事,行書를 잘 썼는데 二王의 法에서 나와 徐浩와 나란했다고 한다. 특히 集字聖教序를 배 워서 院體派의 鼻祖가 되었다. 『易州鐵像碑頌』, 『田仁琬德政碑』등이 있다.
22
學顔公書不難於整齊 難於駘宕 不難於沈勁 難於自然.
顔公의 書를 배움에 整齊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駘宕하기가 어렵고, 沈勁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自然스럽기가 어렵다.
以自然駘宕求顔書 即可得其門而入矣.
自然·駘宕으로써 顔書를 求하면 그 門에 들 수 있다.
顔眞卿의 書를 배움에 整齊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駘宕하기는 어렵다.
沈勁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自然스럽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自然·駘宕함으로써 해서 顔書를 追求하면 그 門에 들 수가 있다.
整齊와 駘宕은 相反되고 沈勁과 自然도 相反된다. 相反되는 것을 止揚하는 곳에 높은 次元이 있다. 따라서 이것을 배우는 사람은 아직 止揚하는 힘이 없으매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虛舟는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23
爭座一藁便可陶鑄蘇米四家.
爭座一藁는 곧 蘇米四家를 陶鑄할 수 있다.
及陶鑄成而四家各具一體貌 了不相襲.
陶鑄가 이루어짐에 이르러 四家는 각각 하나의 體貌를 갖추어 마침내 相襲하지 않았다.
正惟其不相襲 所以爲善學顔書者也.
바로 相襲하지 않는 것만이 顔書를 잘 배운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若千手一同只得古人, 豈復有我?
만약 千手가 하나같이 古人을 얻을 뿐이라면 어찌 다시 我가 있겠는가?
爭座位 一藁가 宋의 四大家를 배출했다. 四大家란 蔡君謨15), 蘇東坡(1036~1101), 黃山谷(1045~1105), 米元章(1051~1107)이다.
15) 蔡君謨(1012~1067) : 北宋 仙遊人. 君謨는 字이며 名은 襄이다. 『謝賜御書表詩卷』, 『萬安橋碑』, 『茶録』
四家는 모두 爭座位에서 나왔지만 각각 하나의 體貌를 이루어 顔書를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대로 답습하지 않음이 顔書를 잘 배웠다는 까닭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배워도 한결같이 古人을 닮는다면 主體性이 없다고 함이 本文의 意味이다.
善學이란 훌륭하게 배운다는 뜻이다. 前述한 魯男子의 故事에 의해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有我·無我에 관해서는 第5章 臨古에서 설명했으니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24
臨淳熙續帖魯公送劉太沖叙書後云
世稱顏書者多以雄勁題目 不知其變化.
乃爾人不自立家 不能與古人.
惟肖顔能打破右軍鐵圍 所以能爲右軍血嗣.
淳熙績帖에 있는 魯公의 送劉太沖叙를 臨한 書後에 이일렀다.
「世上에서 顔書를 칭찬하는 자는 대부분 雄勁으로써 題目하며, 그 變化를 알지 못한다. 스스로 一家를 이루지 못하면 古人과 같이 될 수가 없다.
顔公이 능히 右軍의 鐵圍를 打破함이 右軍의 血嗣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有志臨池者 不可不知此語.
臨池에 뜻을 둔 사람은 이 말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淳熙祕閣帖속에 『送劉太沖叙』 刻本이 실려 있다.
唐 乾元 二年의 것인데 眞蹟이 전해지고 있다. 前述한 바와 같이 宋의 四大家는 爭座位 1稿에 의해서 陶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이 書를 잘 배운 사람은 없었다고 董其昌은 말하고 있다.
虛舟는 祕閣帖의 이 書의 後記에 있는 말을 引用하여 善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상에 顔書를 일컫는 사람은 「雄勁」 두 字로써 그 특징을 표현하고 있으나 顔이 右軍의 法을 배워서 이것을 變化시켰음을 모른다. 누구든지 스스로 一家를 이루지 못하면 참으로 古人과 닮을 수가 없다. 따라서 顔公이 右軍의 法을 打破함으로써 右軍의 血統을 이어받은 後嗣라고 한다.
虛舟는 종종 善學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顔을 예로 들어 右軍의 血嗣라고 한 것은 卓見이다. 肖는 似라는 뜻이지만 古人과 닮는다고 할 때는 古人을 모방한다는 뜻이 아니라 훌륭하기가 古人과 같다는 뜻이다. 賢이나 不肖라고 말함은 모양의 닮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眞價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顔은 그 眞價에 있어서 右軍을 닮았으므로 右軍의 法의 鐵圍를 打破할 수 있었다. 이것이 善學이라고 虛舟는 말한다.
藝術의 傳統은 이러한 善學者에 의해서 계승되고 발전되어 왔다. 巨物과 서로 맞잡고 巨物을 무너뜨리는 곳에 眞面目이 있다. 巨物과 투쟁하지 않는 사람은 巨物이 될 수 없다.
25
顔公書絶變化.
顔公의 書는 變化가 지극하다.
然比於右軍猶覺有意.
그러나 右軍에 비하면 오히려 有意를 느낀다.
然不始於有意 安能至於無跡.
그런데 有意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어찌 能히 無跡에 이를 수 있겠는가?
乃知龍跳虎臥正是規矩之至.
이에 龍跳虎臥(용이 뛰어오르고 범이 누워 있음)가 바로 規矩의 지극함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는 顔公이 右軍의 法을 잘 배워서 크게 변화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右軍에 비하면 作爲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作爲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作爲의 痕跡이 없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龍跳虎臥와 같은 無心의 書는 法을 얻은 지극한 경지에서만 가능하다.
26
顚素二家世稱草聖.
顚·素 二家를 世人은 草聖이라고 한다.
然素師清古於顚爲優.
그런데 素師의 清古함은 顚보다 훌륭하다.
顚縱逸太甚 然楷法精勁則過素師三舎矣.
顚은 縱逸함이 매우 심하지만 楷法의 精勁함은 素師보다 三舎를 지난다.
人不精楷法 如何妄意作草?
사람이 楷法에 精通하지 않고서 어찌 妄意로써 草書를 쓸 수 있겠는가?
顚은 張顚 즉 張旭이고 素는 懷素이다. 이 二家를 世人은 草聖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二家를 비교해 보면 清古한 점은 懷素가 張旭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張旭은 매우 縱逸하지만 楷書를 보면 참으로 精勁하다. 이러한 精勁한 楷書를 쓴 사람이 왜 이렇게 縱逸한 狂草를 썼는가 하고 기이하게 생각할 터이다.
三舎를 피한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 行軍할 때 하루에 30리를 걷고 머문다(숙소를 정한다). 三舎는 90리이다. 그러므로 素師보다 三舎를 지난다고 함은 素師보다 張旭이 훨씬 훌륭하다는 뜻이다. 楷書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서 함부로 狂草를 씀은 邪道라고 虛舟는 말한다.
27
唐以前書風骨內斂 宋以後書精神外拓.
唐 以前의 書는 風骨이 안에 간직되고 宋 以後의 書는 정신이 밖으로 드러난다.
豈惟書法淳漓不同?
어찌 書法만이 淳漓가 다를 수 있겠는가?
亦世運升降之所由分也.
역시 世運이 升降함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다.
惟蔡忠惠公 斂才於法 猶不失先民矩矱.
오직 蔡忠惠公만이 才를 法에 간직하고 先民의 矩矱(먹줄과 자, 곧 法則)을 잃지 않고 있다.
下此諸公各帶習氣去晋唐風格 日以遠矣.
이후의 諸公은 각각 習氣를 띠고 晋唐의 風格에서 떠남이 날로 멀어졌다.
唐 以前의 書는 風骨을 안으로 간직하고 宋 以後의 書는 정신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風骨을 안으로 간직함은 骨氣를 안에 간직하고 외모는 雅潤함을 말한다. 정신이 밖으로 드러남은 神氣를 밖으로 드러내어 안에 품은 것이 모자람을 말한다.
淳은 濃酒로서 質朴함을 말하고 漓는 薄酒로서 華美함을 말한다.
즉 시대가 내려올수록 밖으로 드러냄이 많고 안에 간직함이 모자람을 가리키며 書法도 淳漓가 같지 아니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書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風尚이 점점 下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宋의 蔡君模만은 才를 방종하게 하지 않고 古法을 안에 간직하여 先人의 法을 잃지 않음이 훌륭하다. 이후의 諸家는 모두 習氣를 띠고 晋唐의 風格에서 멀어짐이 날로 심해져 갔다고 虛舟는 말한다. 본문에서는 宋의 四大 중에서 蔡君模를 높이 찬양하고 있다.
28
米老天才横逸東坡稱其超妙入神.
米老의 天才横逸함을 東坡는 妙를 뛰어넘어 神에 든다고 말했다.
雖氣質太重 不免子路初見孔子氣象 然出入晋唐 脫去渣滓而自成一家.
비록 氣質이 매우 강하여 子路가 처음 공자를 뵈었을 때의 氣象을 免치 못하지만,晋唐에 出入하여 찌꺼기를 모두 제거하여 스스로 一家를 이루었다.
涪翁東坡 故當俯出其下.
涪翁東坡는 그래서 당연히 그 아래에 위치한다.
米老는 米元章이다. 重慶府에 속하는 곳에 涪陵이란 곳이 있는데 東坡의 출생지이므로 涪翁이라고 한다.
子路가 처음 공자를 뵈었을 때의 情景에 대해서는 『孔子家語』의 「子路初見第十九」에 실려 있다.
子路가 공자를 처음 뵈었을 때 孔子曰
「너는 무엇을 好하는가?」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長劍을 좋아한다」라고 했다.
孔子曰 「내가 그것을 묻지 않았노라. 그대가 잘하는 점에 學問을 첨가하면 미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子路가 말하기를 「배움이 뭐 유익하겠습니까?」라고 했다.
孔子曰 「무릇 人君에게 諫臣이 없으면 곧 正을 잃고 나에게 敎友가 없으면 곧 聽을 잃는다. 狂馬를 다스리려면 채찍을 버리지 않고 활을 조정하려면 檠(활을 바로잡는 기구인도지개)에 거역하지 않는다.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사람은 諫함을 받으면 어질게 된다. 배우고 물으면 누구든지 順해지지 않겠는가? 仁을 헐뜯고 仕를 미워하면 반드시 刑에 가까워진다. 君子는 배우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子路는 대답하기를 「남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바로 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죽이는 데 이것을 사용하면 犀革도 끊는다. 그러니 무엇을 배울 것이 있읍니까?」라고 했다.
孔子曰 「括(화살촉)로 만들어 여기에 날개를 달고 鏃(화살촉)으로 만들어 이것을 갈면 그 들어감도 또한 깊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子路는 再拜하고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읍니다」라고 했다.
子路가 孔子를 처음 뵈었을 때 위와 같이 저항했다. 그러나 마침내 공자에게 굴복하여 入門했다. 이와 같은 子路의 氣象이 米元章에게도 보인다고 虛舟는 말한다.
米元章은 天才이고 橫逸하다. 東坡는 그를 평하여 超妙入神이라 했다.
그의 氣質은 매우 무거우나 子路가 孔子를 처음 뵈었을 때와 같은 氣質이 보인다. 그러나 晋唐의 古法에 出入하여 他人으로부터 받은 찌꺼기를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一家를 이룬 사람이다. 米元璋에 비하면 東坡는 물론 그의 아래에 위치한다고 虛舟는 말한다.
29
山谷老人書多戰掣筆 亦甚有習氣.
山谷老人의 書는 戰빛의 筆이 많고 또한 習氣도 심하다.
然超超元著 比於東坡則格律清迥矣.
그러나 超超하여 매우 著明하고 東坡에 비하면 格律이 清迥 하다.
故當在東坡上.
그러므로 당연히 東坡의 위에 위치한다.
黄山谷의 書는 戰掣의 筆이 많다고 한다. 戰은 흔들리는 것이고 掣는 굳어지고 수축하여 끄는 것이다. 中風 등으로 흔들리는 붓을 戰掣의 筆이라고 한다.
書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은 中風이 아니라도 늙으면 戰掣가 되는 수가 있다. 山谷의 書는 戰掣의 筆이 많을 뿐만 아니라 습기도 심하다.
그러나 世俗을 뛰어넘어 흐름의 훌륭함이 있어 매우 著名하다. 東坡에 비하면 清迥(맑고 빛남)하다. 그러므로 東坡의 위에 위치한다고 虛舟는 말한다.
30
宋四家書皆出魯公 而東坡得之爲甚.
宋四家의 書는 모두 魯公에서 나왔느데 東坡가 이것을 얻은 바가 가장 심하다.
姿態艶溢 得魯公之腴.
姿態가 艶溢하니 魯公의 腴를 얻은 것이다.
然喜用偃筆無古人清迥抜俗之趣.
그러나 偃筆을 즐겨 사용하여 古人의 清迥抜俗의 맛이 없다.
在四家中 故當少劣耳.
四家中에서 당연히 조금 뒤떨어진다.
宋四大家의 書가 모두 顔魯公으로부터 나왔음은 前述한 바와 같다.
그 중에서도 東坡가 顔法을 가장 會得했으며 姿態에 윤이 넘쳐 魯公의 기름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東坡는 偃筆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古人과 같은 清迥抜俗의 맛이 없다.
偃筆이란 이른바 側筆이다. 이 점이 매우 유감이다. 그래서 四家 中에서 最下位에 둔다고 虛舟는 말한다.
31
有唐一代書格律森嚴多患方整.
唐一代의 書는 格律이 森嚴하지만 지나치게 方整함이 병이다.
至宋四家各以其超逸之姿破除成法.
宋四家에 이르러서는 각각 그들의 超逸한 모습으로써 成法을 깨뜨렸다.
蓋拓向外來 而晉唐嚴謹肅括之意亡矣.
대개 밖으로 드러나서 晋唐의 嚴謹肅括의 뜻이 없어져 버렸다.
至子昂始專主二王 而於子敬得之尤切.
子昻에 이르러 비로소 전적으로 二王을 主로 하되 子敬에게서 얻음이 더욱 절실하다.
閣帖第九巻 字字皆子昂祖本也.
閣帖第九巻은 글자마다 모두 子昻의 祖本이다.
比於宋四家故當後來居上.
宋四家에 비하면 당연히 뒤에 나와서 위에 위치한다.
唐 1代의 書는 格律이 嚴하지만 方整함의 지나친 점이 걸린다.
宋四家에 이르러서는 각각 자기의 超逸한 모습으로써 과거의 成法을 깨뜨렸다. 대체로 含蓄의 깊이를 求하기보다 외모의 獨創을 개척하려 했다.
그 결과 晋唐의 謹嚴肅括의 뜻이 없어져 버렸다. 肅은 삼가함이 깊은 것이고 括은 拓制統括이다.
元의 趙子昂16)에 이르러 비로소 二王을 專攻했으나 특히 王獻之를 會得함이 절실했다. 淳化帖의 第九卷과 第十卷에 王獻之의 書를 모아 놓았는데 子昻이 祖本으로 배운 것은 第九巻의 글자들이다.
따라서 宋의 四家에 비하면 뒤에 나온 子昻이 上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虛舟의 의견이다.
書의 品平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宋의 四家를 子昻의 아래에 둔다는 것은 어떠한가?
16) 趙子昇(1254~1322) : 吳興人. 字는 子昻. 名은 孟頫. 號는 松雪, 水昌宮道人, 甲寅人이라 했다. 『印史』, 『松雪齋集』, 『孫公道行碑』, 『送梨帖』 등의 書跡이 있다.
32
子昂天材超逸 不及宋四家 而工夫爲勝.
子昻의 天材超逸은 宋四家에 미치지 못하나 工夫는 낫다.
晚歳成名後 困於簡對不免浮滑 甚有習氣.
晚年에 이름을 이루었으나 후에 簡對에 시달려 浮滑을 免치 못했고習氣도 심했다.
元時一代 書家皆宗仰之.
元時一代의 書家는 모두 子昻을 宗家로 해서 숭앙했다.
雖鮮于困學諸公 猶爲所盖.
鮮于困學의 諸公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덮히는 바가 되었다.
其他更不足論.
그 외는 다시 논할 것도 없다.
有明前半未改其轍.
明의 전반은 아직 그 자취를 고치지 못했다.
文徵仲使盡平生氣力 究意爲所籠罩.
文徵仲은 평생의 氣力을 다 사용했으나 결국은 子昻에 籠置되는 바가 되었다.
至董思白始抉破之 然自思白以至於今 又成一種董家惡習矣.
董思白에 이르러 비로소 이것을 扶破하였으나 思白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또 일종의 董家의 악습을 이루었다.
一巨子出 千臨百摹 遂成宿習.
한 巨人이 나오면 千臨百摹하여 마침내 宿習을이룬다.
惟豪傑之士 乃能脫盡耳.
오직 豪傑의 선비라야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趙子昻도 天材人으로 남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으나 宋四大家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學書의 工夫는 四家보다 훌륭하다.
晚年에 이르러 書名을 천하에 떨쳤으나 후에 簡對에 시달렸다고 한다.
簡對란 편지를 쓰는 일이다. 浮滑은 用筆의 上滑을 말하며 達筆이 되면 浮滑의 병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習氣가 나온다.
元一代의 書家는 모두 子昻을 宗家로써 敬仰했다. 同時代의 鬼才인 鮮于樞17)까지 子昻의 영향에 들고 말았다.
困學은 鮮于樞의 號이다.
其他의 書家는 말할 것도 없이 子昻類가 되고 말았다.
明代에 들어와서도 전반은 아직 子昻의 자취를 밟고 고칠 수가 없었다.
文徵仲은 文徵明18)이다. 그는 氣力을 다하여 書를 배웠으나 결국은 子昻에 籠罩되어 버렸다.
籠躍란 籠에 갇히는 것으로 자유를 잃는다는 뜻이다.
明의 董其昌에 이르러 비로소 子昻의 籠을 깨어 버렸다.
그러나 董其昌 이후 虛舟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일종의 董其昌의 악습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한 巨人이 나타나면 그를 千臨百摹하여 배우는 사이에 어느새 宿習이 되어 버린다. 그 中에서 다만 특히 우수한 사람만이 巨人의 手中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라고 虛舟는 말한다.
17) 鮮于樞(1257∼1302) : 漁陽人. 字는 伯機이며 困學民, 直寄老人, 虎林隠史라 號했다.『透光古鏡歌』, 『杜甫詩巻』
18) 文徵明(1470~1559) : 明長州人. 名은 璧. 字는 徵明. 號는 衡山, 玉磬山房, 『緑陰帖』, 『刺客列傳巻』, 『遊天池詩』.
33
工夫粹密子昻爲優 天才超妙思白爲勝.
工夫粹密함은 子昻이 훌륭하고 天才超妙함은 思白이 훌륭하다.
思白雖姿態橫生 然究其風力 實沈勁入骨.
思白은 비록 姿態가 橫生하지만 그러나 그 風力을 연구하여 실로 沈勁入骨하다.
學者不求其骨格所在 但襲其形貌所以愈秀愈下愈俗.
배우는 사람은 그의 骨格이 있음을 求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 形貌만을 추구하여 빼어날수록 더욱 下品으로 되고 俗格이 되고 만다.
工夫粹密이란 기교가 세련되어 면밀하다는 뜻이다. 子昻은 工夫粹密한 점이 훌륭하고 其昌은 天才超妙함이 훌륭하다.
其昌은 姿態의 변화가 왕성하므로 이것을 배우는 사람은 현혹되어 버리지만 그 風力의 沈勁함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風力이란 고상한 筆力이다. 愈秀愈下愈俗이란 秀로 되면 될수록 下品이 되고 俗格이 된다는 말이다.
秀에는 上品의 아름다움이 있으나 어딘가 위험한 곳이 있다.
수재라는 것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 폐단은 굳건하지 못함인데, 굳건하지 못하면서 姿態의 변화만을 구하면 결국은 俗格이 된다. 그 병폐에 빠지지 않으려면 形貌를 답습하지 말고 골격을 추구해야 한다고 虛舟는 말한다
34
自樸而華 由厚而薄 世運遷流 不得不然.
樸에서 華로, 厚에서 薄으로 됨은 世運의 遷流로 어찌할 수가 없다.
盖至思白興 而風會之下於斯己極.
대개 思白의 興함에 이르러 風會의 떨어짐은 여기에서 이미 極에 달했다.
末學之士 幾於無所復之矣.
末學의 선비는 거의 이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窮必思反 所貴志古之士能復其本也.
窮하면 반드시 돌아감을 생각하니, 貴한 것은 古法에 뜻을 둔 선비가 능히 그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다.
質朴에서 華美로 되고 重厚에서 輕薄으로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時世의 推移는 이와 같다.
孫過庭도 『書譜』에서 「質朴하다든가 妍美하다든가 하는 것은 시대와 함께 변천하는 것이다. 太古에 文字가 개발되고 그것으로 말을 기록하여 書가 생겼다. 무슨 일이나 시대가 나아감에 따라 淳厚함에서 輕薄함으로, 素朴함에서 文飾으로 변천함은 당연한 것이다.」19)라고 論하고 있다.
대개 董其昌이 나타나고부터 極端으로 書의 품위가 떨어져 버렸다. 유행을 따르는 사람은 이것을 옛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窮하면 반드시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古法에 뜻을 둔 선비가 나타나서 그 근본을 돌이킨다면 그 이상의 것은 없다고 虛舟는 말한다.
19) 『書譜』에 「夫質以代興 姸因俗易 雖書契之作 適以記言 而淳醨一遷 質文三變 馳騖 沿革 物理常然」란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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