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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와 漢文

曺植의 詩와 逸話

耽古樓主 2025. 2. 10. 10:10

曺植의 시와 일화

 

1.한글 시조

三冬에 뵈옷 닙고 巖穴에 눈비 마자
구름 낀 볏뉘도 쬔 적이 업건마는
西山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2. 題黃江亭舍(其一)

路草無名死 山雲恣意生.
江流無限恨 不與石頭爭.

길가의 풀은 이름 없이 죽어가고, 산속의 구름은 자유롭게 피어나누나.

강은 흘러도 한은 끝이 없으나, 돌머리와 서로 다투지는 않네.

(권력에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 한탄한 시로서 2首 중 첫수이다.)

 

3. 劍銘과 惺惺子

 

선비와 칼은 좀체 어울리지 않는 상극이다. 무릇 선비는 붓을 들어야 하고, 칼은 武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남명선생은 이와 달리 선비로서도 평생 칼을 차고 다녔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시퍼런 칼을 턱 앞에 받쳐두고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칼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 그의 칼에는 劍銘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

검명은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敬과 義를 실천하려는 남명선생의 의지와 다름없었다. 칼의 이름을 敬義刀라고 붙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 ‘南冥先生 別集 言行總錄’에는 그가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전한다.

 

남명선생은 칼과 함께 쇠로 만든 방울을 항상 품고 다녔다. 방울에는 ‘惺惺子’라고 이름을 붙였다. 스스로 경계하며 항상 깨어 있겠다는 惺惺의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몸을 움직여 방울이 울릴 때마다 자신을 警戒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방울 또한 칼과 함게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남명이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惺惺子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훗날 남명에게 바치는 시를 지어 존경의 마음을 표할 정도였다.

 

칼을 품고 다니며 선비로서의 외길과 天子도 臣下로 삼을 수 없는 선비가 있다는 古訓을 몸소 실천하여, 선비의 孤高卓節한 氣像을 보여 주었으매, 士類들이 비로소 矜持를 갖게 되고, 벼슬아치는 貪頑을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었다.

 

4. 聞李愚翁還鄕(南冥先生集卷之一 七言絶句)

山海亭中夢幾回 黃江老叟雪盈顋.
半生金馬門三到 不見君王面目來.

山海亭에서 꿈꾸기 몇 번이던가? 黃江 노인 뺨에는 흰 눈이 가득하네.

반평생 金馬門에 세 번이나 나아가도, 임금님은 뵙지도 못하고 왔다지.

▷顋(시): 뺨. 腮는 顋의 俗字이다.

 

고령군수로 부임한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이 당시 경상감사 정언각 (鄭彦慤 1498∼1556)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곧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남명(南冥)은 황강(黃江)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 한 수를 지었으니 이것이다.

이 시는 3번이나 벼슬길에 나갔으나 임금 한번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온 黃江을 나무라고 있다. 황강의 경륜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만큼 높은데도, 낮은 벼슬을 하다가 뜻을 펼치지 못한 친구를 안타깝게 여기는 남명의 배려가 담겨있다고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南冥 曺植과 黃江 李希顔을 松溪 申季誠으로 더불어 嶺中三高라고 부를 정도로 추앙하였다.

 

 

다음의 시도 많이 알려져 있다.

5. 題德山溪亭柱(南冥先生集卷之一 五言絶句)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천 석이나 되는 저 종을 보시게나. 큰 것으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네.

어떻게 하면 저 지리산을 닮아서, 하늘조차 울어도 울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爭(쟁): '어찌, 어떻게’

▷爭似頭流山: 인터넷에 ‘萬古天王峯’으로 된 시가 유포되고 있으나, 그 출처를 모르겠다.

 

 

6. 謾成(南冥先生集卷之一 七言絶句)

取舍人情不足誅, 寧知雲亦獻深諛.
先乘霽日爭南下, 却向陰時競北趨.

취했다 버렸다 하는 세상인심 나무랄 것도 못 되지만, 구름마저 그처럼 아첨할 줄 어찌 알았으랴?

먼저는 갠 날을 틈타 다투어 남쪽으로 내려왔다간, 반대로 날이 흐리면 다투어 북쪽으로 내달으니.

 

 7. 偶吟

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好虎皮相似(호호피상사).
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死後方稱美(사후방칭미).

사람들이 옳은 선비 좋아하는 것이, 호랑이 껍질을 좋아하는 것과 같아.

살아 있을 때는 죽이려 하다가,  죽은 뒤에는 훌륭하다 칭찬한다네.

 

8. 曺植 略傳(1501~1572)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천(仁川)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 · 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서울의 처음 거주지는 연화방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 후일의 판서벼슬을 지냄) · 이준경(李浚慶: 후일 영의정이 됨) 형제와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로 미루어 황효헌(黃孝獻) · 이연경(李延慶)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성운(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성수침(成守琛) 형제에 종유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임을 당한 일과 숙부 조언경(曺彦卿)이 귀양가는 현실을 크게 탄식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생원 · 진사시의 초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실패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闍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 남평조씨)가 김해 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心經)』과 『대학(大學)』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성운 · 이원(李源) · 신계성(申季誠) · 이희안(李希顔) 등과 더불어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지자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이림 · 송인수 · 성우(成遇) · 곽순(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 생활을 청산, 고향인 토골에 계복당(鷄伏堂) ·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이 시기 노진(盧禛) · 강익(姜翼) · 김희삼(金希參) 등이 종유하였으며, 오건(吳健) · 문익성(文益成) · 이광우(李光友)가 처음으로 문하에 출입하였다.

 

1553년 조정에서 내린 사도시주부의 관직을 사양했을 때 이황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와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면서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기를 원하였고,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듬해인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하는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국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심금을 울리기 위해 격한 표현을 썼지만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과부라 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으나 대신과 언관의 구원으로 무사했으며,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정인홍(鄭仁弘) · 하응도(河應圖) · 하항(河沆) · 박제현(朴齊賢) 등 후일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의 토골에서 진주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 · 산청 · 함양 · 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조식을 좇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정탁(鄭琢) · 김효원(金孝元) · 최영경(崔永慶) · 김우옹(金宇顒) · 이정(李楨) · 김면(金沔) · 조원(趙瑗) 등이었고, 정구(鄭逑) · 최황(崔滉) · 곽재우(郭再祐) · 성여신(成汝信)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문정대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여 척신정치가 막을 내리던 1566년(명종 21), 정치쇄신과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성운 · 이항(李恒)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징소되어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받자, 6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은숙배 후 임금을 면대하고 물음에 응했는데 명종의 성의와 대신의 경륜이 부족함을 알고 곧 사직, 하향하였다.

 

이듬해 선조가 즉위한 이후 새로운 정치를 보필할 어진 인물을 구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차례 징소되고, 1569년(선조 2)에는 정4품인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의 벼슬까지 내려졌으나 조정이 헛된 자리로만 대우함을 알고 늙고 병들었음을 구실로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때로는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리되 민생구제가 급선무인데도 조정의 논의에 성리설만 무성할 뿐 실혜(實惠)가 없음을 경계하였다.

 

특히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는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선조 초에 일어난 진주 지역의 음부옥(淫婦獄)에 관련되어 李楨과 절교하고 뒤이어 그 문인들이 주동하였던 음부집안의 훼가출향(毁家黜鄕)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升) 등 일부 관료로부터 비방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는데 조정에 나와 있던 그 문인 오건 · 정탁 등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흉년이라 하여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주고 72세로 별세하기 직전 의원을 보내오는 우대를 받았지만, 이정의 편에 서서 음부옥에 관한 조식의 처신을 비난했던 이황의 편지가 후일 알려지면서 그 문인들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고, 끝내 정인홍(鄭仁弘)에 의한 이언적 · 이황 배척을 불러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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