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春望詞-薛濤 본문
春望詞-薛濤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問相思處 花開花落時.
꽃이 필 제 함께 감상하지 못하고, 꽃이 질 제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묻노니, 그리운 그대 어디 계시는가, 꽃이 피었다 꽃 지는 이 시절에.
攬草結同心 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絶 春鳥復哀吟.
풀 뜯어 동심결 매듭을 지어, 임에게 보내려 마음먹었네.
봄의 시름 이렇게 끊고 있는데, 봄 새가 다시 와서 애달피 운다.
▶ 同心結(동심결): 두 고를 내서 매는 매듭. 納幣용 실, 또는 殮襲의 띠를 매는 매듭 따위에 쓴다.
▶ 知音(지음): 거문고를 잘 타는 伯牙라는 사람에게 음률에 대해 잘 아는 鍾子期라는 친구가 있었다.
백아는 오직 종자기 한 사람만이 자기의 연주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자기가 만들어내는 음률을 통해 마음의 소리까지 설명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한 번은 백아가 먼 곳을 다녀와서 종자기를 찾아갔으나 그의 아내에게서 종자기가 이미 세상을 떠, 馬鞍山에 묻혔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백아는 종자기의 묘를 찾아가 그 앞에서 종자기를 위하여 한 곡을 연주한 후에 거문고를 땅바닥에 던져 부숴버렸다. 그리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이후로 '음을 알다'라는 뜻의 '知音'이 莫逆한 벗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꽃잎은 바람에 날로 시들고, 아름다운 기약 아직도 아득하네.
한마음인 그대와 맺지 못하고, 애꿎게 동심초만 묶고 있네.
那堪花滿枝 飜作兩相思.
玉箸垂朝鏡 春風知不知.
꽃 가득한 저 가지를 어찌 견디랴, 뒤치어 두 사람의 그리움 되네.
아침에 거울 보며 울었다는 걸, 봄바람은 아느냐 모르느냐?
▶ 玉箸(옥저): 눈물을 가리킴. 어떤 출처에는 '옥조玉莇(구기자 조, 메밀 유)'라고도 나옴.
이백의 「閨情」이란 작품에 "玉箸日夜流,雙雙落朱顔"이라는 구절이 나옴.
작자-薛濤 [768 or 770~832]
당나라 때 활약한 여류시인으로 자는 洪度이고 長安 사람이다.
어렸을 때 관리가 된 부친 薛鄖을 따라 成都로 옮겨가 살았으며 아홉 살 때 벌써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다.
부친이 세상을 뜬 뒤에 집안이 기울자 열여섯 살에 妓女가 되었으나, 詩를 잘 지어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才女로 이름을 떨쳤는데, 음률과 시와 서예 모든 방면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자색이 뛰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용모를 앞세워 白居易 · 元稹 · 劉禹錫 · 杜牧 등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유하며 지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원진과의 정분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녀가 成都에 살 때 그곳의 최고 지방군정장관인 劍南西川節度使가 모두 열한 차례 바뀌었는데, 그들 대다수가 그녀와 시를 주고받았고, 韋皋 같은 이는 부임하면서 설도에게 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할 것을 德宗에게 주청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녀는 기적에서 빠진 뒤에도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는데, 만년에는 두보초당으로 유명한 成都 서쪽 교외에 있는 浣花溪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곳 인근에서는 木芙蓉을 원료로 사용하여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작고 붉은 종이를 만들어 이것으로 蜀의 명사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것이 풍류인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받으면서 같은 모양과 색깔을 가진 종이가 薛濤箋 또는 浣花箋이라는 이름을 얻고 크게 유행하였다.
李商隱 같은 시인도 「서천으로 가는 최각을 보내며(送崔玨往西川)」이란 작품에서 "완화계의 종이는 복숭아 빛깔(浣花箋紙桃花色)"이라고 했다. 그녀의 시 91수가 전한다.
참고
春望詞는 설도가 사천성 성도 교외 浣花溪에 은거할 때, 만난 시인 元稹과 맺은 정분을 잊지 못하고 그를 기다리는 애틋한 심정을 읊은 것이라 한다.
설도는 원진이 東川監察御使로 임명되어 성도에 온 뒤 그와 몇 차례 만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원진은 正人君子로 행세했지만, 여성 遍歷이 복잡한 전형적인 난봉꾼이었다.
일찍이 사촌 여동생과 정혼한 뒤 그녀를 배신한 적이 있었다.
원진과 정혼녀의 얘기는 원진의 자전적 소설 鶯鶯傳, 일명 會眞記에 실려 있다.
이는 나중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 元나라 때의 저명한 극작가 王實甫에 의해 희곡 西廂記로 각색된다.
서상기는 훗날 春香傳에도 영향을 준다.
설도가 원진을 사모하여 그에게 정을 주려 하자,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원진이라는 사람의 인물 됨이 풍류를 좋아하고 가벼워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도는 주변의 충고를 물리치고 원진에게 순정을 바쳤다.
얼마 후 원진이 浙東의 관리로 전임되어, 현지로 떠나게 되었다.
원진은 현지에 부임하면 곧 설도를 불러 함께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절동으로 떠난 원진은 이후 아무런 소식도 보내오지 않았다. 초췌한 심정으로 속절없이 원진의 부름을 기다리던 설도가 '춘망사'를 지어 자신의 심사를 달래고 있을 때, 원진은 이미 浙江省 昭興 일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名妓 劉采春과 놀아나고 있었다.
설도와 나눴던 아름다운 추억은 그의 뇌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원진은 타고난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유채춘과 연정을 불태웠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유채춘이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원진은 여러 여자를 전전했지만 그가 아내로 맞이한 사람은 조정 대신 韋夏卿의 딸 韋叢(아명 韋成之)이었다.
어디까지나 출세를 위한 정략적 선택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진은 나중에 아내 韋叢이 죽자 2년도 못 되어 安씨 여인을 첩으로 들였고, 裴淑을 다시 후취로 맞았다.
원진으로부터 배신의 아픔을 잊을 즈음, 薛濤는 성도로 온 당대의 대시인이자 풍류객인 杜牧과 시와 풍류를 나누며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나이가 두목보다 몇 살 위인 것을 이유로 결별을 선언, 두 사람의 연분은 그렇게 끝을 맺고 만다.
원진은 遣悲懷三首라는 시를 지어 두 부인에 대한 사죄의 노래를 짓는다.
우리나라 가곡 '同心草'
이시는 잘 알려진 우리나라 가곡 '同心草'의 원작품이다.
金億(1896~?)이 번역한 '春望詞' 제3수를 노랫말로 하고, 金聖泰가 곡을 붙여 1946년에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