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4대성지 - 2.룸비니 (Lumbini)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는 슛도다나왕의 옛 도읍으로 네팔에 있으며 국경에서 가깝다.
룸비니 국제 사원지구에 한국의 대성석가사가 있다.
높이 42m의 대웅전은 황룡사 9층탑을 모델로 1995년부터 콘크리트로 지었다.
한국 절만 숙박시설이 있어 (식사포함 3,000원)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다.
대웅전은 최근에 완공되어 내부시설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방문객이 묵는 숙소건물과 식당이 있는 3층짜리 요사채. ( 대지 12,000평 )
룸비니는 메카를 찾는 이슬람 순례자나 예루살렘을 찾는 그리스도 교인처럼 불교의 순례자들에게는 영원한 성지이다.
룸비니는 네팔 南部의 인도 국경 근처인 테라이(Terai) 평원에 있는데,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포이러(Feuhrer)가 돌기둥에 새겨진 고대 비문을 해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룸비니 동산의 국제사원지구에는 用地를 99년간 무상으로 임대하는 조건으로 한국사찰인 大聖釋迦寺를 비롯한 각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살린 사원들이 건설되어 있다.
▶마야데비(Mayadevi)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세계문화유산인 룸비니 성지의 정문.
석가가 태어나신 자리에 지은 마야데비(Mayadevi) 사원은 1943년 재건한 것이다.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
푸스카르니(Puskarni) 연못은 마야부인이 출산하기 전 목욕하고, 부처를 목욕시킨 곳이다.
▶아소카 석주(Asoka Pillar)
1896년 포이러 박사가 아소카 석주(Asoka Pillar)를 발견할 때까지 폐허였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탑 상단의 말 조각이 벼락에 파괴됐다는 기록이 있다.
石柱의 銘文 내용: “부처님이 탄생한 곳이라 세금을 면제하고, 추수기에는 ⅛만 받겠노라.”
네팔의 테라이 지방에 2,500여년 전 마가다국의 비호를 받고 있던 코살라국의 보호령이었던 카필라(Kapila)라는 인구 100만 정도의 부족국가가 있었고, BC 623년 (565년 등 異說이 많다.) 석가족(Shakyas)의 슈도다나왕(淨飯王)의 왕비인 마야데비(Maya Devi)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브다하(콜리성 )로 가던 중 룸비니에 있는 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BC 249년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Ashoka 왕이 찾아와 네 개의 불탑과 석주를 세웠는데, 돌기둥에는 “신들의 사랑을 받는 아소카왕이 재위 20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여 석주를 세우다. 룸비니 마을의 세금을 감면하고, 생산량의 ⅛만 바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라는 칙령이 쓰여 있다.
부처님 탄생지. 불자들이 붉은 벽돌에 금박을 붙여, 주위 벽돌이 금색이다.
부처가 태어난 자리를 표시한 아기 붓다의 족적.
구룡 못과 無憂樹
무우수 나무에 걸린 룽따.
룸비니는 15세기까지 순례 성지였다.
룸비니의 초기 역사는 중국의 유명한 순례자들인 법현(法顯. 409년 )과 현장 (玄奘. 637년 )의 글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방문한 사원과 불탑, 다른 건물들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14세기 초엔 Ripu Malla 왕도 자기의 순례기를 아소카 석주에 명문으로 추가하였지만, 14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 지역을 파괴하고 매몰시켜 15세기 이후엔 룸비니 순례가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 지역 사람들만 3세기 ~ 4세기의 마야데비 상을 힌두교의 어머니 신으로 숭배하였다.
1896년 포이러 박사가 아소카 석주 (Asoka Pillar)를 발견할 때까지 불교 사원은 파괴되어 폐허로 있었다.
수많은 스투파(탑)와 사원들이 있었던 자리가 토대만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9세기의 수많은 벽돌 사리탑과 수도원의 흔적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후 유적지들을 찾을 수 없었는데, 629년경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당나라 현장법사가 남겨놓은 대당서역기의 내용이 불교의 유적지를 발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다.
Mayadevi 사원은 11세기에 지어져서 1943년에 재건된 곳이며, 남쪽의 Puskarni 연못은 마야부인이 석가모니를 낳기 전 목욕을 했고,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목욕시켰다고 알려진 성스러운 곳이다.
마야부인에게 바쳐진 고대 사원유적의 토대에 기념석비가 있다.
2003년 네팔정부에서 성지에 건물을 지었으며 부처님 탄생을 묘사한 조각상과 부처님 발자욱터, 승방과 승원터 등 유적이 건물 안에 있다.
정반왕은 40이 넘어서야 겨우 아들을 얻었으나, 마야부인은 7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처가 된 이모 (최초의 비구니)에 의해 양육되었고, 16세 (혹은 19세)에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얻었으나, 29세에 출가하였다.
많은 스승을 모시고 수도하였으나, 누구도 태자가 품었던 '죽음과 삶의 문제'에 관해서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자, 육신을 학대함으로써 정신이 그 결박을 벗고 해탈할 수 있다는 요가와 같은 극도의 수련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6년의 苦行으로도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몸은 너무 쇠약해져서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단식을 중단하고 체력을 회복한 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채 깊은 명상에 잠긴지 7일째 되던 날, 태자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부근에서 49일을 명상하며 보내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태자는 자신을 붓다(Buddha, 佛陀, 깨달은 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洞察했다는 긍지이며, 萬有의 存在 當爲를 獨特한 知見)으로 열어 보였다는 자부이기도 했다.
붓다는 이후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상대방의 신분이나 학식, 직업에 맞게 설법하였기 때문에 많은 신자를 얻었다.
만년에 사촌 동생의 모반사건, 동족인 석가족의 멸망. 상수제자의 죽음 등 인간적인 불행을 맛보기도 했다.
釋迦牟尼(Śākyamuni, 석가족 출신의 성자)는 부처, 釋迦世尊, 能仁寂默, 如來, 佛陀, Buddha, 佛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본명은 Gotama Siddhārtha, 석가는 Sākya의 한자 발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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