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漢文

詠史(영사)/左思(좌사)

耽古樓主 2023. 3. 14. 02:06

1수

弱冠弄柔翰(약관농유한) 卓犖觀群書(탁락관군서)

약관에 글을 즐기며 뛰어난 재주로 만권의 책을 읽었다.

著論准過秦(저논준과진) 作賦擬子虛(작부의자허)

논술은 과진론에 준하고 부를 지음에는 자허부를 따랐다.

 

邊城苦鳴鏑(변성고명적) 羽檄飛京都(우격비경도)

변방의 성채에 화살 나는 소리에 괴로웠고 원군의 격문은 서울로 날아들었다

 

雖非甲冑士(수비갑주사) 疇昔覽穰苴(주석람양저)

비록 갑옷 입은 무사는 아니었지만, 지난날 사마양저의 병법을 배워

 

長嘯激淸風(장소격청풍) 志若無東吳(지야무동오)

길게 휘파람부니 맑은 바람과 부딪치고, 품은 뜻은 동오의 손씨 안중에도 없었다.

 

鉛刀貴一割(연도귀일할) 夢想騁良圖(몽상빙량도)

무딘 연도도 한 가지 역할에는 귀중하고, 꿈속에서도 좋은 계략 생각하며 달린다.

 

左眄澄江湘(좌면징강상) 右盼定羌胡(우반정강호)

왼쪽을 돌아보며 장강과 상수(湘水)를 맑게 하고, 오른쪽을 돌아보며 강호(羌胡)를 평정하고자 했으나

 

功成不受爵(공성부수작) 長揖歸田廬(장읍귀전려)

공을 이룬다 해도 작위는 받지 않고, 길게 읍하고서 시골집으로 돌아간다.

 

2수

鬱鬱澗底松(울울간저송) 離離山上苗(리리산상묘)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 계곡물이 흐르고, 산 위의 띠 싹은 무성히 늘어져 있는데

 

以彼徑寸莖(이피경촌경) 蔭此百尺條(음차백척조)

한 치 두께의 줄기로써 백척의 가지를 덮고 있도다!

 

世冑躡高位(세주섭고위) 英俊沉下僚(영준침하료)

문벌의 자식은 고위직을 차지하고 영준한 인물은 하위직에 그치는도다!

 

地勢使之然(지세사지연) 由來非一朝(유래비일조)

지위나 세력이 이런 식으로 된 유래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金張借舊業(금장차구업) 七葉珥漢貂(칠섭이한초)

김일제와 장탕의 후손들은 옛 공업을 빌려 칠 대에 이르도록 벼슬에 한초를 꽂았다.

 

馮公豈不偉(풍공개부위) 白首不見招(백수부견초)

어찌 풍공이 위대하지 않았겠는가마는 백발이 되어도 벼슬에 나아갈 수 없었도다!

 

3수

吾希段幹木(오희단간목) 偃息藩魏君(언식번위군)

내가 존경하는 단간목은, 위문후를 보위하다 물러나 은거했고

 

吾慕魯仲連(오모노중련) 談笑卻秦軍(담소각진군)

내가 앙모하는 노중련은 담소(談笑)로 진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當世貴不羈(당세귀불기) 遭難能解紛(조난능해분)

귀한 자에게 구속받지 않은 세상에 처해 환난을 만나 능히 그 근심을 해결하고

 

功成恥受賞(공성치수상) 高節卓不群(고절탁불군)

공을 이루었으나 상을 받음을 수치라 여겼다. 높은 절개로 무리를 짓지 않고 뛰어났음에도

 

臨組不肯絏(임조불긍예) 對珪寧肯分(대규녕긍분)

인끈을 받아 허리에 두르기를 거부했으니 어찌 관직인들 받아들이겠는가?

 

連璽曜前庭(연쇄요전정) 比之猶浮雲(비지유부운)

관인을 꼬챙이에 꿰어 조당의 앞뜰을 비추니 마치 하늘의 뜬 구름과 같도다!

 

4수

濟濟京城內(제제경성내) 赫赫王侯居(혁혁왕후거)

성안의 집들 즐비하고 왕후장상들의 저택들 우람하다.

 

冠蓋蔭四術(관개음사술) 朱輪竟長衢(주륜경장구)

관모를 쓴 귀인들이 탄 거마가 사방의 도로를 덮고 붉은 색 바퀴들이 네거리에서 얽혔네

 

朝集金張館(조집금장관) 暮宿許史廬(모숙허사려)

아침에는 김대감과 장대감 댁에 모이고 저녁 때는 허후(許侯)와 고후(高侯)의 저택에 묶는다.

 

南鄰擊鍾磬(남린격종경) 北裏吹笙竽(북리위생우)

남쪽 거리에서는 종소리 경쇠소리 울리고 북쪽 거리에서는 생우(笙芋) 소리 들려오지만

 

寂寂揚子宅(적적양자택) 門無卿相輿(문무경상여)

적적한 양웅(揚雄)의 집 앞은 경상의 가마 보이지 않고

 

寥寥空宇中(요요공우중) 所講在玄虛(소강재현허)

집안은 쓸쓸하고 공허하여 태현경(太玄經)의 말대로 허무하기만 하다.

 

言論准宣尼(언론회선니) 辭賦擬相如(사부의상여)

언론은 공자의 말씀을 법칙으로 삼고 사부는 사마상여를 모방했다.

 

悠悠百世後(유유백세후) 英名擅八區(영명천팔구)

아득한 백 세대 후에나 명성은 천하에 떨치리라!

 

5수

皓天舒白日(호천서백일) 靈景耀神州(영경요신주)

활짝 하늘은 밝은 해를 펴보이고 태양의 신령한 빛 중국에 빛난다

 

列宅紫宮裏(렬댁자궁리) 飛宇若雲浮(비우야운부)

집들은 천자의 궁성 뒤에 이어있고 나는 듯한 용마루는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하다

 

峨峨高門內(아아고문내) 藹藹皆王侯(애애개왕후)

높은 담장 안쪽은 높고도 험하고 안개 속 높은 누각은 모두가 왕후들이 사는 곳이다

 

自非攀龍客(자비반룡객) 何爲口來遊(하위구래유)

훌륭하고 권세 있는 사람 아닌데 무슨 구실로 와서 노닐고 있는가

 

被褐出閶闔(피갈출창합) 高步追許由(고보추허유)

천민의 옷을 입고 궁성을 나와서 고상한 걸음걸이로 허유를 추모한다.

 

振衣千仞岡(진의천인강) 濯足萬裏流(탁족만리류)

옷자락은 천 길 언덕에 날리고 만리 흐르는 물길에 발을 씻으리라

 

6수

荊軻飲燕市(형가음연시) 酒酣氣益震(주감기익진)

연경의 시정에서 술마시던 형가가 취기가 돌아 더욱 세차게 일어난 기운으로

 

哀歌和漸離(애가화점리) 謂若傍無人(위약방무인)

고점리의 축에 화답하여 부른 슬픈 노래는 마치 방약무인하듯 도도했다.

 

雖無壯士節(수무장사절) 與世亦殊倫(여세역수륜)

장사의 절조는 없다하나 일반 세인들과는 역시 매우 달랐다.

 

高眄邈四海(고면막사해) 豪右何足陳(호우하족진)

높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세상을 업신여겼으니 호걸 부호들인들 족히 대상이 되겠는가?

 

貴者雖自貴(귀자수자귀) 視之若埃塵(시지약의진)

비록 스스로를 귀하다 여기는 귀인들이지만 마치 티끌처럼 하찮게 생각했고

 

賤者雖自賤(천자수자천) 重之若千鈞(중지약천균)

비록 스스로를 천하다고 여기는 천민이지만 중하기를 천균처럼 무겁게 생각했다.

 

 

7수

主父宦不達(주보환부달) 骨肉還相薄(골육환상부)

사십 평생 벼슬에 나가지 못한 주보언(主父偃)은 골육으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買臣困樵采(매신곤초채) 伉儷不安宅(항려불안택)

나무꾼이 되어 곤궁한 처지에 빠진 주매신은 부부가 거처할 집도 없었다.

 

陳平無產業(진평무산업) 歸來翳負郭(괴래예부곽)

하는 일 없이 놀고먹던 진평은 성곽을 지붕으로 삼은 허물어진 집에 살았고

 

長卿還成都(장경환성도) 壁立何寥廓(벽립하요곽)

빈손으로 성도로 도망친 사마상여는 벽만 붙어있는 집에 살았다.

 

四賢豈不偉(사현기불위) 遺烈光篇籍(유열광편적)

이 네 현인이 어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위대한 업적을 쌓아 역사책에 빛나도다.

 

當其未遇時(당기미우시) 憂在填溝壑(우재전구학)

뜻을 얻지 못해 불우했을 때 근심일랑은 모두 도랑에 묻어버렸고

 

英雄有迍邅(영웅유둔전) 由來自古昔(유래자고석)

영웅이 고난을 당하는 일은 자고로 옛날부터 유래되었고

 

何世無奇才(하세무기재) 遺之在草澤(유지재초택)

어찌 세상에 기재가 없다고만 하겠는가마는 모두 초야에 묻혀 사라질 뿐인 것을

 

8수

習習籠中鳥(습습농중조) 擧翮觸四隅(거핵촉사우)

갇혀있는 초롱 속의 새 날개 들어 날면 사방에 닿는다.

 

落落窮巷士(낙낙궁항사) 抱影守空廬(포영수공려)

뜻을 잃은 구차한 선비 어두운 그늘 품고 빈 초가에 산다

 

出門無通路(출문무통노) 枳棘塞中塗(지극새중도)

문을 나서도 갈 길 하나 없고 탱자나무와 대추나무로 중도에 막혀있다.

 

計策棄不收(계책기부수) 塊若枯池魚(괴야고지어)

계책은 버리고 받아주지 않으니 물 말라버린 연못의 물고기 같다.

 

外望無寸祿(외망무촌녹) 內顧無鬥儲(내고무두저)

집밖을 보아도 조금의 녹봉도 없고 집안을 보아도 쌓아둔 양식도 없다.

 

親戚還相蔑(친척환상멸) 朋友日夜疏(붕우일야소)

친척들도 나를 멸시하고 친구들도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구나!

 

蘇秦北遊說(소진배유설) 李斯西上書(이사서상서)

소진은 북방에서 유세하고 이사는 서방에서 글을 올려

 

俯仰生榮華(부앙생영화) 咄嗟復雕枯(돌차복조고)

굽어보고 올려보아 영화를 얻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조락했도다!

 

飮河期滿腹(음하기만복) 貴足不願餘(귀족부원여)

강에서 물마시고 배를 채우면서 만족하여 즐길 뿐, 많은 것을 원치 않는다.

 

巢林棲一枝(소림서일지) 可爲達士模(가위달사모)

숲속에서 둥지 만들어 나뭇가지에 살며 통달한 선비의 모범으로 삼으리라.

좌사(左思)

 

西晉人으로 자는 太沖이고, 임치(臨淄: 지금의 산동성 임치현) 출신이다. 정확한 생몰 연대는 모두 미상이고 서진 왕조시대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문인이다. 그의 출신은 미천하였지만,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서예와 고금(鼓琴)을 배웠으나 모두 대성하지 못했다. 그 후에 부친의 격려로 학문에 힘썼다. 서진 무제(武帝) 태시(泰始) 8년(272)에 그의 누이동생 좌분(左분)이 재명(才名)으로 궁중에 발탁되어 들어가게 되자 집을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좌사는 일찍이 비서랑(秘書郞)과 사공좨주(司空祭酒)를 역임하기도 하였고, 원강(元康) 연간(291∼299)에는 당시의 문인집단인 "이십사우(二十四友)"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 당시의 권세가 가밀(賈謐: 晉惠帝 賈皇後의 조카)에게 ≪한서(漢書)≫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혜제(惠帝) 영강(永康) 원년(300)에 가밀이 피살되자 좌사는 의춘리(宜春裏)로 가서 은거하여 전적(典籍)에 전념하였다. 후에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 그를 불러 기실독(記室督)으로 삼으려 하자 그는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태안(太安) 2년(303)에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雝)의 부장 장방(張方)이 낙양에서 난동을 일으키자, 그는 집을 기주(冀州)로 옮겼으며, 몇 년 후에는 병사하였다.

 

좌사는 외모가 추하고 눌변이며 교우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의 노력으로 <三都賦>를 완성하였는데, 당시에 이것이 얼마나 유명하였던지 귀족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끼느라 일시에 낙양의 종이가 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당시의 문단에서는 그가 <삼도부>로써 영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문학적으로나 후세에 미친 영향의 면에서는 오히려 <영사>시가 더 중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좌사의 작품은 賦 2편과 시 14수가 있으며, <삼도부>와 <영사>시가 각각 그의 작품을 대표한다.

 

1. 영사시(詠史詩)의 창작 연대

 

영사시의 창작 연대에 대해서는 사료(史料)의 부족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1수는 “왼쪽으로 향해 동오를 정벌하고, 오른쪽으로 눈돌려 강호를 평정하리(左眄澄江湘, 右盼定羌胡.)” 句에서 동오(東吳)가 멸망하기 이전인 태강(太康) 원년(280)에 지어졌다고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이로부터 나머지 시들도 이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정론이 아니다. 시의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나머지 7수도 제1수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듯하나, 제1수와 제3수, 제2수와 제7수의 내용이 비교적 근사한 점으로 보아 8수의 시가 일시에 창작된 것은 아닐 것이다.

 

2. 영사시의 특징

좌사의 영사시는 모두 8수로서 ≪문선(文選)≫에 실려 있다. 시의 내용은 대체로 원대한 포부를 자술하고, 문벌제도에 분개하며, 현사(賢士)를 찬미하고, 좌절을 한탄하는 것 등으로 개괄할 수 있다.

 

원래 “詠史”란 시의 형식을 빌어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한 것이며, 이를 최초로 시의 제목으로 삼은 이는 반고(班固)이다.

 

그러나 반고의 <영사>는 단순히 하나의 시로써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만을 설명식으로 노래하여 너무 딱딱하기 때문에, 종영(鐘嶸)은 ≪시품(詩品)≫에서 그의 시를 “질박하지만 문채가 없다.(質木無文)”라고 평하였다. 반고 이래 왕찬(王粲), 완우(阮瑀) 등이 <영사>를 지었으나, 그것은 반고 <영사>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후 완우의 <은사(隱士)>와 두지(杜摯)의 <증관구검(贈毌丘儉)>에서는 하나의 시로써 하나의 사실을 노래한 형식은 타파하였으나, 작법이 너무 기계적이고 딱딱하다는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배경으로 창작된 좌사의 <영사>는 이름은 반고를 따르고 체제는 두지를 근본으로 하였으면서도 과거의 전통적인 작법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을 뒤섞어 고금을 융합하고 연이어 비유를 끌어들이는 등 영사시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좌사의 영사시는 한 시대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국한되지 않고 예로부터 중시해온 역사 현상에 대하여 심각하게 사고하여 철리성(哲理性)이 매우 풍부하다. 그리하여 좌사의 영사시는 “이름은 영사이나 실제로는 영회(詠懷)이다.(何義門 ≪古詩賞析≫: 名爲詠史, 實爲詠懷.)”라고 일컬어졌다. 이같이 심각한 현실의 사실을 교묘한 예술형식으로 표현해낸 것이 좌사 영사시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종영는 좌사를 평하여, “전아하되 원망스러우며, 뜻하는 바가 정확하되 절실하여 諷諭의 뜻을 얻었다.(鐘嶸 ≪詩品≫: 文典以怨, 頗爲精切, 得諷諭之致.)”라고 하였는데, 이는 좌사의 영사시에 매우 적합한 평이라 할 수 있다. 또 심덕잠(沈德潛)은 좌사의 영사시를 평하여, “좌사의 영사는 반드시 한 사람만을 읊지도 않고 한 사실만을 읊지도 않았다. 고인을 노래하면서 자기의 성정을 모두 나타내었으니 이는 천고의 절창이다. 후에는 명원(明遠)과 태백(太白)만이 그것을 할 수 있었다.(沈德潛 ≪古詩源≫卷7: 太沖詠史, 不必專詠一人, 專詠一事, 詠古人而己之性情俱見. 此千秋絶唱也. 後惟明遠太白能之.)”라고 극찬하였으니, 여기에서 좌사 영사시의 뛰어난 문학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도연명(陶淵明)의 <영빈사(詠貧士)>, <영형가(詠荊軻)>로부터 포조(鮑照)의 <영사>, 진자앙(陳子昻)의 <감우(感遇)>,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공자진(龔自珍)의 <영사>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좌사의 영향을 받았으니, 후대에 미친 그의 문학적 공헌도 대단히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