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獅熊之鬪(사웅지투) 본문

漢詩와 漢文/古事와 成語

獅熊之鬪(사웅지투)

耽古樓主 2025. 5. 9. 21:43

獅熊之鬪(사웅지투)



문헌: 

 

만해한용운연구(萬海韓龍雲硏究)

 

 유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제 백담사(白潭寺)로 가서 연곡(連谷)에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의 계명은 봉완(奉琓)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홍성(洪城)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혁명(東學革命)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시베리아 등지로 방랑하다가 돌아와 불교를 개혁하고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불교 대중화와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만해는 일제 때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치욕적으로 생각하여 民籍이 없이 살았다. 그로 인하여 받은 대가는 혹독했다.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식량과 의류 등 일체의 생활필수품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런 고초 속에서도 무남독녀 외딸 영숙(英淑)은 왜놈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며 집에서 손수 공부를 가르쳤다.
 

1937년 봄, 조선총독부에서는 불교를 친일화시키려고 전국 31개 본산의 주지(住持)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자리에서 마곡사(麻谷寺)의 만공(滿空) 송도암(宋道巖. 1871~1946)선사가 총독부를 향해 일성을 토했다.
  “옛날에는 시골 승려들이 감히 장안에 들어서지도 못했고, 어쩌다 몰래 들어오면 볼기도 때리고 엄한 법률로 다스렸는데, 이제 총독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볼기 맞던 시절이 그립도다. 우리를 여기에 부른 것은 소위 사찰령을 내려 승려의 조직을 휘어잡으려는 속셈 같은데, 만일 그리한다면 총독부가 무간지옥(無間地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음모를 꾸미는 총독이야말로 진짜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만공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책상을 치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자 장내는 아연 긴장하여 총독 미나미 지로((맘차랑)를 주시했다. 금방 무슨 날벼락이라도 내리지 안겠는가 마음을 졸이며 만공이 무모하다고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헌병이 들이닥쳐 만공 스님을 체포하려 했다. 그런데 총독이 무슨 생각에선지 이를 제지시켰다. 그리고 참석한 스님들을 전부 총독관저로 초대하여 다과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만공의 호통에 스님들의 친일화 계획을 포기했던 것이다.
 

만공은 한달음에 만해 스님을 찾아갔다. 만공이 총독을 호되게 꾸짖은 소식은 삽시간에 장안에 퍼졌다. 그런데 그 일을 미리 알고 있던 만해는 만공이 찾아오자 매우 반가이 맞았다.
  만해가 입을 열었다.
  “기왕이면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의 주장자(拄杖子)로 총독의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겼더라면 시원했을 걸…….”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막대기 싸움은 곰(熊.웅)이나 하는 짓이고, 호령은 사자라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까 만공 자신은 사자가 되고, 만해는 곰이라는 이야기였다.
  만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호령은 새끼 사자가 하고,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법이지.”
  그리되면 만공은 새끼 사자이고, 만해는 큰 사자라는 뜻이다.
 

당대 불교계의 걸출한 두 선사는 서로 자웅을 겨룰 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만해가 떠나자 만공은

‘이제 한양에 가도 만날 사람이 멊구나.’

라고 하면서 한양에는 발걸음을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고사성어에서)

 

'漢詩와 漢文 > 古事와 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등(葛藤)  (1) 2025.06.01
任重道遠(임중도원)  (0) 2025.05.21
四不三拒  (3) 2025.05.04
石銘如飛鳥之影  (0) 2025.04.29
膠漆之心  (0) 2025.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