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信厚眞友(신후진우) 본문
信厚眞友(신후진우)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전라도 부안(扶安) 단산(丹山) 고을에 김재곤(金在坤)이라는 선비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이마가 시원스러워 이름을 용진(容珍)이라고 불렀다.
용진은 친구 사귀기를 몹시 좋아해서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놀곤 했다.
아버지 김재곤은 아들이 친구들과 즐기는 것을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나 가리지 않고 사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넌지시 물었다.
“용진아, 넌 오래된 친구가 많으냐, 새로 사귄 친구가 많으냐?”
아들이 대답했다.
“속담에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된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럼, 벗을 많이 사귀는 게 좋으냐, 아니면 적지만 깊게 사귀는 게 좋으냐?”
“사귀는 수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벗이 몇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귀는 벗들은 모두 마음으로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실한 벗들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야 많을수록 좋겠지, 그런데 이 아비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다. 나에 비해 너는 너무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 같더구나. 작은 고욤(크기가 작은 품종의 감) 일흔이 왕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그러자 아들이 자신에 찬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살찌고 빼빼 마른 것은 석수한테 달렸지요. 저는 벗들에게 진심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제게 진심을 주고 있다고 장담합니다. 미덥지 못하시다면 한번 시험을 해보시지요.”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자꾸나!”
아버지는 뒤뜰로 나가 큰 자루에 짚다발을 우겨 넣고는 그걸 지게 위에 얹었다.
“오늘 날이 어둑어둑해지거든 이걸 지고 네가 가장 믿는 친구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보거라. ‘친구. 내가 어쩌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되었는데 좀 숨겨줄 수 없겠는가?’ 그러고 나서 그 친구의 태도를 살펴보란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찾아가서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했다.
친구는 그 말을 듣자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오래 사귄 벗이니 자네를 관가에 고발하지는 않겠네만 자네를 숨겨 줄 수는 없네.”
그러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꽝’하고 대문을 닫더니 빗장까지 단단히 지르는 것이었다.
돌담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풀이 죽어 있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얘야, 실망할 것 없다. 넌 친구가 여럿 있으니 다음 친구를 찾아가 보자꾸나.”
아들은 허탈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또 다른 친구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이 친구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쌀쌀하게 거절했다. 아들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숨을 헐떡거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지게를 내려놓게 했다.
“그럼 어디 이번에는 내 친구에게로 가보자.”
별빛이 총총한 그믐날 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친구 집에 이르러 황급하게 대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한밤중에 자네가 웬일인가?”
“잠을 깨워 미안하네만 내 아들이 말다툼을 하다가 그만 사람을 죽였다네, 좀 숨겨줄 수 없겠나?”
“아이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아무튼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친구는 국을 뜨겁게 끓여 음식을 내왔다.
“그 경황에 어디 저녁이나 들었겠나, 우선 따뜻하게 국물이나 좀 드시게. 참, 술 한 잔 하겠는가?”
아버지는 술 한 사발을 들이켜고 나서 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느냐?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것이란다.”
그러자 아버지의 친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버지는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우정을 시험한 꼴이 되어 미안하네. 사실은 내 아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아무나 함부로 사귀는 것 같아 진정한 친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큰 결례를 해 미안하네.”
그러고는 아들을 보고 말했다.
“가는 길이 멀어야 타고 가는 말의 힘을 알 수 있으며, 사귄 지 오래되어야 벗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사귀었어도 그 속에 믿음이 없으면 그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벗과 벗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친구니라.”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국민학교였나, 중학교였나, 도덕(바른생활)교과서에 실렸던 글이다. 2025.4.27 耽古樓主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