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論語集註 序說(논어집주 서설) 본문
論語集註序說
논어는 공자가 저술한 책이 아니고 공자의 제자 중 증자와 有子의 문인들이 저술하였다고 여겨진다. (공자보다 46세가 아래인 증자의 죽음이 논어에 나오므로 증자가 죽을 무렵에는 공자의 제자가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으리라고 당나라 유종원이 의문을 제시하여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論語:孔子與弟子論難詰問之語의 略字 集註:주자가 11家의 注疏를 모음. 大全: 영락제가 발간한 永樂大全에 수록된 본 |
史記世家曰:
「孔子名丘, 字仲尼, 其先宋人.
父叔梁紇, 母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 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 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 而弟子益進.
《史記》의〈孔子世家〉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孔子는 이름이 丘요, 字가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魯나라 襄公 22年(B.C. 551) 庚戌年 11月 庚子日(21日)에 孔子를 魯나라 昌平鄕 陬邑에서 낳았다.
孔子는 어려서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陳設하며 禮의 몸짓을 행하였다.
장성하여 委吏[창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이 公平하였고, 司職吏[축산 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周나라에 가서 老子에게 禮를 묻고 돌아온 뒤에, 弟子들이 더욱 많아졌다.
▶공자는 제후가 아니므로 世家에 들지 못하는데 素王(왕은 아니나 왕의 덕을 갖춘 사람)으로 불렸고, 시호도 문성왕이다. 공자가 문선왕이므로 그의 사당을 文廟라 한다
▶紀傳體: 사기(사마천), 한서, 당서, 삼국사, 고려사
編年體: 자치통감(사마광). 조선왕조실록
紀事本末體: 연려실기술
▶仲尼는 字(親之之辭)이므로 諱하지 않아도 된다.
▶宋나라의 先代는 殷나라이다.
▶以魯의 以는 시간을 나타내는 어조사
▶俎豆:祭器. 籩(대나무 제기. 과일을 담음) 俎(도마. 떡,적따위를 담음) 豆(목기. 물기가 있는 제물)
▶도덕경을 지은 道敎의 老子는 李耳이고 공자가 도를 물은 老子는 老聃이니 다른 사람이다.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昭公 25年(B.C. 517) 甲申은 孔子 나이 35세였는데, 昭公이 齊나라로 달아나서 魯나라가 혼란하였다.
孔子께서는 이에 齊나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家臣이 됨으로써 齊景公과 疏通하였다.
▶奔: 他國 出: 本國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景公이 尼谿의 土地를 孔子에게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嬰이 不可하다 하니 景公이 안영에게 미혹되었다.
孔子는 마침내 떠나서 魯나라로 돌아오셨다.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專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定公 元年(B.C. 509) 壬辰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季氏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家臣인 陽虎가 亂을 일으켜 政權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孔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경 書경, 禮경, 樂경을 편수하시니, 弟子들이 더욱 많아졌다.
▶선왕이 6월 이전에 넘겨주면 그해는 원년이 된다. 선왕이 6월이 지나서 넘겨주면 그해는 즉위년이 되고 다음 해가 원년이 된다.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以費畔季氏, 召, 孔子欲往, 而卒不行.
定公 9年 庚子는 孔子 나이 51세였다.
公山不狃가 費邑을 가지고 季氏를 배반하고 孔子를 부르자, 가시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費邑은 계씨의 본거지이다.
▶지명+ 宰: 守令
▶인명+ 宰: 家臣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定公이 孔子를 中都의 邑宰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본받아서 마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司寇가 되시었다.
十年辛丑, 相定公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10年 辛丑에 定公의 相이 되어 齊나라 君主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齊나라 임금이 魯나라에게서 침탈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相: 돕다. 재상이 되다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12年 癸卯에 仲由로 하여금 季氏의 家臣을 삼아 세 都邑의 城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다.
孟氏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仲由:자로의 이름
▶三都: 孟孫(成) 叔孫(邱) 季孫(費)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齊人歸女樂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
定公 14年 乙巳는 孔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少正卯를 주벌하고, 國政에 참여하여 들었다.
3개월만에 魯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齊나라 임금이 여자 樂師를 보내어 (魯나라가 잘 다스려짐을) 저지하는데, 季桓子가 이것을 받았다.
郊祭를 지내고 또 제사지낸 고기를 大夫들에게 주지 않자, 孔子는 魯나라를 떠나셨다.
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衛나라에 가서 子路의 妻兄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妻兄: 손윗동서이다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旣解, 還衛, 主蘧伯玉家, 見南子.
陳나라로 가실 적에 匡땅을 방문하니, 匡땅 사람들은 陽虎라고 여겨 拘留하였다.
풀려난 뒤에 衛나라로 돌아와 蘧伯玉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고 南子를 만나보셨다.
去適宋, 司馬桓魋欲殺之.
又去, 適陳,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衛나라를 떠나 宋나라에 가시니, 司馬인 桓魋가 죽이고자 하였다.
또 宋나라를 떠나 陳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主人을 정하였다.
3년 동안 거주하다가 衛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晉趙氏家臣佛肸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晉나라 趙氏의 家臣인 필힐(佛肸)이 中牟땅을 가지고 배반한 다음 孔子를 부르니, 孔子는 가시려고 하였으나 또한 결행하지 않으셨다.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蘧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서쪽으로 가서 趙簡子를 만나 보려고 하시다가 黃河에 이르러 돌아와 다시 蘧伯玉의 집에 主人을 정하셨다.
靈公이 陣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陳나라로 가셨다.
季桓子卒, 遺言謂康子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召冉求.
季桓子가 죽을 적에 遺言하여 이르되 반드시 孔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康子는 마침내 冉求를 불러왔다.
孔子如蔡及葉.
孔子는 蔡 땅과 葉 땅에 이르셨다.
楚昭王將以書社地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楚昭王이 書社의 땅을 가지고 孔子를 봉해주려고 하니, 令尹인 子西가 不可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輒欲得孔子爲政.
而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다시 衛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衛나라 君主인 輒이 孔子를 얻어 政治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冉求가 季氏의 將帥가 되어서 齊나라와 싸워 戰功을 세우자, 康子가 마침내 孔子를 불렀으므로 孔子가 魯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年 丁巳年으로 孔子 나이 68세였다.
▶輒:出公輒이라 한다. 靈公이 죽자 영공의 첩인 南子가 음탕하였다. 영공의 아들 괴가 남자와 다투자 자신의 아비인 괴를 내쳤다하여 出公이라 함
▶爲政: 다스릴 爲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그러나 魯나라는 끝내 孔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孔子도 벼슬함을 추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書傳》과 《禮記》를 編敍하셨다.
《詩》를 刪定하고 音樂을 바로잡았으며, 《周易》의 彖傳, 繫辭傳, 象傳, 說卦傳, 文言傳을 次序하셨다.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二人.
弟子가 대략 3천 명이었는데, 몸소 六藝를 通達한 자는 72명이었다.
▶六藝:예악사어서수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作春秋.
哀公 14年 庚申에 魯哀公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麒麟을 잡으니, 孔子는 《春秋》를 지으셨다.
▶사냥:春田(畋) 夏苗(묘) 秋狩 冬獵
▶춘추: 魯西狩獲麟(춘추의 마지막 편명)의 麟과 經을 합하여 麟經이라 한다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十六年壬戌 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冢上, 凡六年.
이듬해 辛酉에 子路가 衛나라에서 죽었다.
哀公 16年(B.C. 479) 壬戌 4月 己丑日(11日)에 孔子가 별세하시니, 나이가 73세였다. 魯나라 都城의 泗水가에 葬禮하였다.
弟子들이 모두 心喪 3年을 입고 떠났으나, 子貢만은 무덤 가에 廬幕을 짓고 모두 6년을 지내었다.
▶卒:正寢에서 죽음
▶死: 橫死
▶己丑日:그해 4월에 기축일은 없고 을축일의 오기로 본다. 4월 을축일은 18일이다.
▶자공이 여막살이하며 공자묘의 경관을 조성하였다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子思學於曾子, 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 」
孔子는 鯉를 낳으니, 字가 伯魚였는데 먼저 죽었다.
伯魚가 伋을 낳았으니, 字가 子思로 《中庸》을 지으셨다.
▶공자-증자-자사-맹자-정자-양시-나종언-이통-주자
何氏曰:
『魯論語二十篇. 齊論語別有問王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何晏이 말하였다.
“《魯論語》는 20篇이다.
《齊論語》는 별도로 〈問王〉과 〈知道〉 두 篇이 있어서 모두 22篇이며, 그 20篇 가운데의 章句도 魯論보다 상당히 많다.
《古論語》는 孔氏(孔安國)의 집 벽 속에서 나왔는데, 〈堯曰〉 아래 章의 〈子張問〉을 나누어 한 篇을 만들어서 두 〈子張篇〉이 있으니, 모두 21篇이며, 編纂의 차례도 《齊論語》나 《魯論語》와 같지 않다.”
▶何氏:何晏(魏)이다. 論語集解(훈고학의 대가인 包咸, 馬融,鄭玄,孔安國의 주를 모음)를 저술함.
▶梁나라 皇侃이 論語正義를 저술함
▶北宋의 邢昺이 集解와 正義를 임금의 명에 따라 모아서 論語註疏를 만듦.
▶朱子가 위 3개의 주석본과 송나라 11家의 註釋을 합친 것이 論語集註이다
▶《古論語》: 공자의 집 벽 속에서 나온 篆書로 쓰여진 논어본. 이 책을 찾은 한나라 魯恭王 劉餘가 공자 12세손 孔安國에게 주어 예서로 바꾸게 함. 공안국이 역적이 되어 죽게되자 예서본도 散失됨.
▶우리가 보는 논어는 魯,齊,古의 논어를 前漢 安昌候 張禹가 편집한 것이다.(張禹는 왕망의 왕위 찬탈을 도왔고, 논어에도 僞文을 넣음)
▶우리나라에는 신라 신문왕 때 논어가 들어왔고 설총이 해석을 붙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
程子(伊川)가 말씀하였다.
“《論語》의 책은 有子와 曾子의 門人에게서 완성되었으므로, 그 책은 유독 두 분만을 子라고 일컬었다.”
▶程子(二程): 형: 明道(私諡) 程顥
동생: 伊川(號) 程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
정자가 말씀하였다.
“《論語》를 공부함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 두 句를 터득하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곧바로 손이 춤을 추고 발로 뛰는 것을 모르는 자도 있다.”
▶이 문장은 語類(또는 語錄)이다. 古文은 문어체이고 백화는 구어체이다. 문어체에 조사를 넣은 것이 어류이고 고문과 백화의 중간단계로서 초기백화라고 한다.
▶讀:배우다의 뜻
▶好: 좋다. 좋아하다. 好色(아름다운 미색, 미색을 좋아하다. 둘 다 가능함)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程子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독서할 줄 모른다.
예를 들면 《論語》를 읽는데,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런 등급의 사람이라면 곧 읽은 적이 없는 것이다.”
▶便是: 是는 어류에 쓰이며 is의 뜻이다.
程子曰:
「頤自十七八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
程子가 말씀하였다.
“나는 나이가 17∼18세 때부터 《論語》를 공부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의 義意는 깨우쳤다.
공부하기를 더욱 오래할수록 다만 意味가 深長함(深而遠)을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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