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相( pali. sañña, skt. saṃjñā)’이란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불경에서 ‘상에 얽매이다’, ‘상에 집착하다’, ‘상을 여의라’ 등의 용어가 자주 나옵니다.
불교에 있어서 ‘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 데 비해, ‘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의 모습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일종의 固定觀念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 고정관념이 갖가지 왜곡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갈등과 번뇌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의식 속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순간 불성을 바로 볼 수 있다고 해서 <금강경>에는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합니다.
그런 ‘相’이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되기 전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에는 samjna, laksana, nimitta의 세 가지가 있어서 이 말들이 같은 ‘相’이라는 글자로 번역되었지만, 불경에서 쓰임에 따라 그 뜻은 다소 다릅니다.
samjna(산냐)
주로 생각, 견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러한 samjna는 수백 가지 수만 가지가 있지만, <금강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을 윤회에 들게 하고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四相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끊을 것을 강조합니다.
그 4상은 중생이 실재한다고 믿는 네 가지의 相, 즉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입니다.
그러면서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에게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보살도 그러한데 수행이 안 된 중생은 더욱 심하여 四相이 실재한다고 믿으며,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nimita(니미따)
형상, 모습의 뜻으로 <금강경>에서 보살은 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과거로부터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한 대상을 만났을 때 생겨난 인상(일종의 선입견, 전체적인 첫인상)을 일컫습니다.
laksana(락샤나)
어떤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상, 특별한 모양으로서, 부처님의 ‘32相과 80種好’라고 해서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특징을 말할 때의 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특수한 형태의 뜻으로서 <금강경>에 ‘여래의 身相으로 여래를 봤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때의 상이 이것입니다.
즉,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습, 모양, 특징, 현상 등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눈으로 꽃을 본다고 할 때 꽃의 모양과 형상은 nimita의 상에 해당하고, 그 꽃이 지닌 개병적인 특별한 모습은 laksana에 해당하며, 꽃을 보고 꽃이라고 일으킨 생각들은 samjna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용어를 똑같이 ‘相’이라는 글자로 번역한 이유는, 이들 사이에는 그 의미에 있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상이나 모습에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게 마련이고, 저 앞에 어떤 형상이 있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에 이미 인식된 앎이 있다는 것이니까, 이 모두를 다 함께 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4상인 我相 · 人相 · 衆生相 · 壽者相은 위의 ‘samjna(산냐)’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4상도 사람 혹은 시대에 따라 해석이 구구했습니다.
예전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나라는 관념= 아상
- 사람이라는 관념= 인상
- 중생이라는 관념= 중생상
- 목숨이라는 관념= 수자상
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 아상= 자기중심적 사고
- 인상= 사람 중심적 사고
- 중생상= 동물 중심적 사고
- 수자상= 생명 중심적 사고.
그러나 최근에 이를 아래처럼 바로잡았습니다.
- 자아가 있다는 관념= 아상
- 개아가 있다는 관념= 인상
- 중생이 있다는 관념= 중생상
- 영혼이 있다는 관념= 수자상
아래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입장에서 4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我相(atman samjna)
아상이란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我’ 혹은 ‘自我’라는 생각을 말하며,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주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정의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속성은 변화하기 마련으로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成住壞空하고, 생각은 生住離滅하므로 우주의 모든 것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결국 없음’을 알았고, 그것이 諸法無我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면서 자아를 신[브라흐만]에게 종속시키는 凡我一如의 神 중심 사회로서 인간이 신의 노예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人本의 새로운 사상을 세우고, 인연의 법칙에 의할 뿐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我의 진리를 펼치고 我相을 여의라고 하셨습니다.
즉, 五蘊을 “나, 나의 것,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을 我相이라 하여, 모든 괴로움이란 한 마디로 五取蘊苦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중생은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아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 이 현상계가 만들어져서 다른 相들도 모두 이 我相으로 인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상, 수자상, 중생상은 아상의 다른 표현일 뿐, 4상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我相입니다.
我相이 모든 상에 빠지는 근원이므로 아상을 여의지 못하면 凡夫이고, 我가 滅盡되고, 모든 번뇌를 다 끊어버려서 참다운 無我가 되어야 해탈이 된다고 합니다.
즉, 아상이 부서지면 모든 상이 다 부서지고, 아상을 버리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下心이 이루어질 수 없고, 下化衆生을 할 수도 없으며, 無住相布施를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人相( pudgala samjna)
여기서 ‘人’을 사람이라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인은 사람의 의미가 아니고 인간의 몸이나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개체적 원리를 말한다. 즉, 部派佛敎시대에 犢子部에서 주장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를 말합니다.
바라문들이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atman에 대하여, 붓다는 현실적으로 경험하기 불가능한 가공의 망상이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部派佛敎 시대에 와서는 윤회에 있어서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기고, 불멸 후 300년 경 부파불교 시대에 犢子部와 正量部에서는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것은 초기 경전에도 있던 개념으로 뿌드갈라의 어원은 ‘사람, 생명 등 살아있는 존재’로서 鳩摩羅什은 人으로 옮겼고 현장은 補特伽羅로 音寫했습니다.
윤회의 주체로서 개아를 인정하는 것은 붓다께서 주창한 무아의 불교이념에 背馳되는 것으로, 여기에 대하여 불교의 각 교단은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 명쾌하지는 못합니다. 붓다께서도 당초에 뿌드갈라를 4상의 하나로 지목해 놓았으니, 내가 윤회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교만한 마음의 인상(개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해석에서는 人相을 我相처럼 집착하는 모습의 하나로서, ‘남’을 의식하는 데에서 오는 행동과 생각이라 말해왔습니다.
이와 같이 개아(인상)를 나와 남을 갈라놓는 분별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뿌드갈라의 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개아는 ‘나’라는 我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 하겠습니다.
즉, 개아는 眞我와 대비되는 아상으로서 진아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기(개아)를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자기(개아)를 버림은 곧 망심과 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心空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독자부의 뿌드갈라(pudgala)를 부정하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비약입니다.
왜냐하면 뿌드갈라를 제시한 독자부가 생긴 것은 불멸 후 300년이 경과한 후의 일이기 때문에 석존께서 부파불교시대의 주장인 뿌드갈라를 직접 지적하셨다 하기엔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衆生相(sattva samjna)
sattva란 넓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구마라습은 衆生으로, 현장은 有情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중생상은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가지는 본능적 집착을 일컫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재미있고 좋은 것만 탐내는 등 이기적인 행동이나 상념의 집착으로 나타나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로 돌리려 합니다.
둘째,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즉, 별다른 수행도 없이 苦가 없는 天界에 태어나고자 하는 祈福佛敎도 중생상의 소산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고, 자기의 일에 지나친 욕심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입니다.
넷째, 중생상은 자신의 몸이 五蘊이 화합해 이루어진 참된 실체라고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를 가집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생명체와 생명이 없는 자, 유정과 무정을 나누는 이원론적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我相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순입니다.
다섯째, 나는 중생이니까 부처님과 같이 해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스스로 退屈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상은 열등의식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인데, 초기 대승불교에서 sattva(중생)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중생은 부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실재가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상을 갖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자기 비하적인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와 중생을 분별해서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고 불도를 닦는데 게을리한다거나 불도를 닦아도 부처가 된다는 확신이 없는 이것이 중생상입니다. 모든 중생은 그 자체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수행을 통해 불성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一切衆生悉有佛性이요 見性成佛인 것입니다.
壽者相(jiva samjna)
수자상의 원어인 jiva는 영혼, 목숨, 생명이라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생사를 초월한 존재 또는 영원불멸의 ‘순수영혼’이 있다는 견해로서, 구마라습은 壽로, 현장은 命으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壽者(산스크리트어 jīva)란 목숨, 생명체, 목숨 달린 존재(생명체, 육신을 가진 존재)를 말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하비라 Mahavira’가 창시한 자이나교(Jainism)에서 ‘순수한 영혼(jiva)’으로 설정했던 것이니, 이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五蘊은 모두가 실체가 없어 한시도 머물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그 속에 영생불멸의 윤회하는 주체로서 순수영혼이 있어서 오온은 사라져도 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릇된 착각을 하는데 그러한 착각을 수자상이라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설’을 반박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즉 諸行無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종전에는 이 수자상을 ‘목숨’으로 이해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욕심이라 해석했으나 지금은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의 존재설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상으로 볼 때,
- 我相은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아트만(atman)’을 부정한 것이고,
- 人相은 독자부와 정량부에서 주장한 뿌드갈라(個我)를 부정한 것이며,
- 衆生相은 중생들의 어리석음, 열등의식, 퇴굴심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고,
- 壽者相은 자이나교(Jainism)에서의 ‘순수한 영혼(jiva)’ 즉, 영혼불멸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말들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잘못된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4상을 극복해야 비로소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중생이 어떻게 하면 4상이라는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금강경> 해설의 최고 권위자인 六祖 혜능대사는 범부와 수행인을 구분해서, “4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4상이 없으면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이 迷하면 중생이요,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라고 하는 말과 같으니, 결국 4상을 극복하는 길은 마음을 昏迷하게 하는 망념을 극복해 正見을 갖추는 것이겠습니다.
이 글은 아미산(이덕호)님의 견해를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2022.5.8. 부처님오신날 삼을서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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