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同散異

子路(자로)에 대하여

耽古樓主 2023. 3. 4. 01:52

 

자로

 

 
1. 개요

 

누군가 曾子의 아들인 曾西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과 자로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하겠습니까?"
증서가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말하였다.
"그분은 제 아버지께서도 敬畏하셨던 분입니다."
<孟子 公孫丑上>
  • 자로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이다.
  • 孔子의 핵심 제자 孔門十哲의 한 사람.
  • 본명은 仲由로, 흔히 알려진 이름인 자로는 자이다.
  • 季路라고도 부른다.
  • 공자보다 9살 아래다.
  • 공자의 여행 동안 고난을 함께 하였다. 주로 공자의 護衛를 자처하며 시기하는 무리들로부터 공자를 여러 번 지켜내기도 했다.
  • 子貢, 顏淵과 함께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자공이 智, 안연이 仁으로 유명하듯 자로는 보통 勇에서 으뜸가는 인물로 꼽힌다.
  • 또한 성격 때문에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비교되기도 한다.
  •  

츠키오카 요시토시 ( 月岡 芳年 , 1839 년 ~1892 년 ) 가 그린&nbsp; ' 독서의 달 ( 読書 の 月 )'.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자로의 집안은 본시 가난하였으므로 자로는 어려서부터 나물밥만 먹으며 자랐는데, 그럼에도 자로는 부모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래서, 후일 장성하여 출가한 뒤에 고향집에서 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살게 된 데다가 자신도 끼니를 자주 거르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로는 자나 깨나 가난한 부모의 끼니 걱정만을 하였으니, 어쩌다 쌀을 구하기만 하면 쌀포대를 들쳐업고 백 리의 길을 달려가 부모를 봉양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기록은 二十四孝의 爲親負米(부모를 위해 쌀을 지다.)편에 실려있다.
子路負米의 成語도 있다


 

2. 공자와 만나다

 

본래 야인(野人) 출신이었으며, 힘도 셌다. 그 이름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공자의 말에 의하면 자로가 제자가 된 후에는 공자를 험담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자가 강론하고 있는 현장에 뛰어들어 공자에게 행패를 부리려다가 공자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인생의 스승을 만나 운명이 바뀐 건달 캐릭터들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자로가 공자의 3대 제자 중 하나로 추앙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살아생전의 일생뿐 아니라 실로 그에 대한 萬世의 평가를 바꾼 만남인 셈이다.

 

'孔子家語'에 서술된 그 만남의 일화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집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로가 들이닥친다. 더벅한 머리에는 관을 썼는데 꿩의 붉은 깃털을 꽂아 장식했고, 거친 가죽옷의 옆구리에는 단단히 질긴 끈을 묶어 돼지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와 긴 칼을 찼으며, 양손에는 각각 수탉과 새끼 돼지를 들고 있으니 전형적인 野人의 모습이었다. 난데없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쳐들어온 자로를 보고 제자들은 당황하고 경계하는데, 자로가 뭘 하기 전에 공자가 자못 능청스레 선수를 쳐서 질문을 던지며 대화는 시작된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자로가 卽答한다.

“나는 긴 칼을 좋아한다.”

공자가 은은히 미소를 띠며 천천히 말한다.

“나는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다. 그대가 능한 것 위에 배우기와 묻기[學問]를 더하면 누가 그대를 따라잡겠는가? 나는 이것을 물은 것이다.”

자로는 드디어 일갈하기 시작한다. 사실 당초부터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으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배우고 묻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에 공자가 바로 대답한다.

“군주에게 간언하는 신하가 없으면 올바름[正]을 잃는다.

선비가 일깨워 주는 벗이 없으면 들은 바[聞]를 잃는다.

그러므로 길들지 않은 말을 몰 때는 채찍을 놓을 수 없으며, 활을 잡으려면 도지개로써 바로 해야 한다.

나무는 먹줄을 받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간언을 들어야 착해진다.

이제 사람에게 가르침과 배움[敎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든[物] 바로잡고 닦고 갈아야 재목으로 쓰이는 것이다.

배우고 묻기를 소중히 여긴다면 누구인들 나쁜 일을 하겠는가. 만일 어진 이를 헐뜯고 선비를 미워한다면 필시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배우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자로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말문이 막혔고, 공 아무개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인물은 아님을 대강 눈치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평소 생각하여 둔 신조가 있고 자존심이 있었으므로 반격을 시도한다.

“남산의 대나무는 휘지 않고 스스로 곧으니, 이것을 그냥 잘라다가 화살로 쓰면 쇠가죽도 뚫을 수 있다. 천성이 뛰어난 자에게 무슨 배우고 묻기가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공자는 여유롭게 대답한다.

“그 화살 한쪽에다 꿩의 깃털을 붙여다가 깃을 만들고, 다른 한쪽에다 쇠를 붙여다가 촉을 만들면, 단지 그 쇠가죽을 뚫음에 그치겠는가!”

이에 자로가 즉시 수탉과 새끼 돼지를 내려놓고 공자에게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감화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설도 있는데, 대부분 학문보다는 자신의 무용이 귀중하다며 공자에게 역설하다가, 공자가 필부의 무용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설명해주자 감화된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공자의 체격이나 勇力도 자로 못지 않았고, 공자의 아버지는 싸움깨나 한다는 무사였으며 맨손으로 관문을 부쉈다는 언급도 있다.

 

공자는 아버지 叔梁紇을 닮아 키가 엄청 컸다. 9척 6촌, 대략 190㎝ 정도에 해당하지만, 고대에는 도량형이 달라서 170㎝ 언저리일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사마천도 '사람들이 공자의 큰 키를 신기하게 생각했다.'라고 쓴 걸 보면 눈에 띌 정도의 거한이었던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을 때라서 학문과 무예를 함께 연마해야 했던 시기였다.

당연히 공자 역시 기본적인 무예 실력이 있었고, 공자의 교육과정인 六藝(禮·樂·射·御·書·數)에도 군사훈련의 성격이 있다.

 

공자가 문란하기로 유명한 南子와 회견하였을 때 자로가 분개하니, 공자는 '하늘이 보고 있느니라.'라는 말로 자신의 결백을 두 번이나 맹세해야 했다.

또 공자가 두 번이나 費邑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 할 때도 항의하였다.

 

南子: 衛靈公의 부인으로 송나라 공주 출신이라 송나라의 姓인 子를 붙여 陳后 南子라고 부른다. 위령공 사후에도 위나라 정치에 깊이 개입했고 여러 남자를 갈아치우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등 악명이 높지만 의외로 공자를 무척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로는 공자에게 제자라기보다 친구였으리라 생각하는 견해도 있으나, 엄연히 자로가 공자를 경어로 부르는 기록을 보면 공자의 친구설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단, 공자의 제자 중에 직접적으로 항의하는 모습이 서술되어 있는 것은 자로뿐이므로 자로와 공자 간의 거리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친밀하고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나이 차이도 9살 밖에 되지 않으므로, 공자도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자로를 살갑게 대했던 듯하다.

 

3. 공자의 평가

자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의 안연편에는 자로는 배운 것을 다음 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의하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고 일단 배우면 깨우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자로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아직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했는데 또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까 염려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라고 할 정도로 열심인 제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혈기왕성한 자로를 자주 꾸짖기도 했지만, 한번 가르치면 충실히 따르는 자로를 몹시 아꼈다.

 

공자 문하에서는 자공과 함께 제후들의 영입 제의가 많이 들어 온 사람이지만, 정작 어떤 사람이 자로가 대신감이냐고 묻자 공자는 "신하 머릿수만 채울 자다."라고 말했다. 자로는 공자가 만족할 정도의 큰 그릇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엔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한데, 일단 공자는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자네가 이상한 질문을 할 줄 알았다. 결국 이런 걸 물어보는구나."라고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했었다.
여기서 자로가 대신감이냐고 물은 사람은 季子然으로 다름 아닌 季氏 가문의 一員이었다.
이 계씨 가문은 예법대로라면 천자의 제사에서만 쓸 수 있는 八佾舞(8×8=64명이 추는 춤. 제후는 6×6=36의 六佾舞, 대부는 4×4=16의 四佾舞만 시킬 수 있어 季子然은 사일무까지만 가능했다.)를 자기 집 마당에서 추게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며 노나라의 국정을 농단하던 집안으로, 계자연이 자로와 염유가 대신감이냐고 물어본 것도 이미 자로와 冉由를 가신으로 등용한 상황에서 자랑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일부러 자로와 염유를 머릿수만 채우는 신하라고 깎아내려서 계씨의 기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논어의 先秦篇)

 

논어를 보면 자로는 혼나는 게 일이다. 스승을 위한다고 예법에 어긋나게 높이다 까이질 않나...

 

심지어 칭찬을 듣고 좋아한다고 혼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스승이 자신의 勇을 칭찬하니까 자로는 기뻐하며 자신의 신조로 삼고자 그 말씀을 받아적었다.

공자는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라고 면박을 주었다.

 

공자에게 하도 꾸중을 듣자, 나중에 온 어린 제자들까지 자로를 무시하게 되니, 공자는 방안에 들일 정도(入室弟子)는 아니라도 마루에 앉을 정도(升堂弟子)는 된다며 자로를 감싸기도 한다.

 

그래도 공자가

'세상이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며 은거나 할까. 그때가 되면 나를 따를 이는 由가 적합하겠지. 유는 나보다도 더 용기있는 인물이니. 다만 사리분별을 못해서 그렇지.‘

라고 말할 정도니 재주는 특출나지 못해도 가장 아끼는 제자임은 틀림없으리라.

이 말을 듣고 스승이 자기를 가장 아낀다고 좋아하자, 공자는 또 나무라기도 한다.

 

공자가 안회를 칭찬하자, 자로는 자신이 武藝와 軍務에 밝은 것을 피력하였다.

"선생님께서 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맨손으로 호랑이와 맞서는 사람, 큰 강을 걸어서 건너다가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무모한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임할 때는 반드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 나는 신중하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일을 성공시키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

 

이런 자로도 칭찬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공자가 '낡고 해진 솜옷을 입고 여우나 담비 가죽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자로일 터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자로는 '원망하지도 않고 탐을 내지도 않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라는 시의 구절을 외우고 다녔다.

그런 자로를 본 공자는 '그 정도의 도를 어찌 훌륭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비웃었다.

 

정리하자면 학구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먼, 불같은 성정을 가졌고 학문에 뛰어나지도 못했던 탓에, 학식과 예를 중시하는 공자는 자로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가 자신보다도 그 용기와 강직함이 뛰어나다고 인정할 만큼 고지식하고 충직하여 가장 아꼈던 제자이기도 하다.

공자가 학문의 제자로서 가장 아꼈던 이가 顔回라면 인간적으로 가장 가깝고도 아꼈던 이는 자로인 셈이다.

 

이 때문인지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三反弟子도 자로의 이런 매력에 끌려 이 글을 모아 보았다.

 

4. 죽음

衛나라에서 孔悝(공회)를 섬겨 벼슬을 하다가, 衛出公의 아비 蒯聵가 자신의 主公 공회를 위협하여 도움을 받고 出公輒을 내쫒자, 자로는 공회를 구출하러 단독으로 성으로 갔다. 가는 길에 동문인 子高(高柴)가 말렸으나 듣지 않고 "그 녹을 먹은 자 그 난을 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며 성으로 가서 공회를 풀어달라고 괴외에게 요구한다.

 

괴외가 거부하자 그들이 올라있던 대(臺)를 불태우려다 衛莊公(蒯聵가 출공을 내쫓고 군위에 오른 후의 칭호)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죽을 때 칼에 맞아 머리에 쓴 갓이 삐뚤어지자 "보라! 군자는 죽더라도 갓은 벗지 않는다!"라고 외치고 갓을 제대로 고쳐 쓴 뒤 사망.

 

공자는 衛에서 亂이 있음을 듣고, 자로의 강직한 성격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예견하고,

"아이고 자로가 죽었겠구나!“

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이전에 ‘자로는 제명에 못 죽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고 말았다.

자로는 원래 공자와 나이 차이가 열 살 정도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꽤 오래 살았는데 사실 죽을 당시 62세였다.

자로의 訃音을 들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끊어 버리는구나...“

라고 두 번 외쳤다.

공자가 제자의 죽음에 절규했던 이야기는 史書에 딱 2번 나온다.

그것은 안회가 절명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고 했던 것과 자로의 이 죽음이다.


공자가 크게 울어댔는데, 제자가 진정시키려 하자, "내가 지금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 같은가? 지금 안회를 위해 슬퍼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지금처럼 슬퍼하겠느냐?"라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논어 先秦篇에서 ‘顔淵死 子哭之慟’이라고 하였는데 哭之慟이란
‘(상례喪禮에 따라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哭을 하시다가 (自身도 모르는 사이에) 큰 소리로 서럽게 흐느끼시며 慟哭 하시니’로 번역한다.

 

자로가 죽은 뒤에는 "자로가 내 제자가 된 뒤에, 나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경애하던 스승에 대한 비난을 폭력을 이용해서라도 막았던 자로의 죽음에 대한 탄식이다.

 

자로가 죽은 후에 그의 屍身은 젓갈로 만들어져 공자에게 보내졌고, 공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집안의 젓갈들을 모두 다 내던져 버리고 멀쩡한 젓갈만 봐도 그 일을 생각하며 입에 대지 못하다가, 결국 자로가 죽은 이듬해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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