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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儀의 黃孫承과 媳之禮敎(식지예교)

耽古樓主 2025. 4. 23. 07:24

媳之禮敎(식지예교)


媳:며느리 식, 之:어조사 지, 禮:예도 예, 敎:가르칠 교.
어의: 며느리의 예절교육이라는 말로, 손아래 사람이 어른의 부족한 점을 깨우쳐 주는 것을 이른다.
문헌: 한국해학전집(韓國諧謔全集)
 

조선 숙종(肅宗) 때 직장(直長) 황손승(黃孫承. 1632~1707)은 예의(禮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만큼 엄격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은 걸음걸이와 앉음새, 음식예절, 말투까지 천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부모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종7품(從七品)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그런 그이기에 해가 떠도 예의, 달이 져도 예의, 그저 예의로 일관하다 보니 제일 딱한 사람은 그 집 아들이었다. 혼기가 닥쳐왔는데도 예의만 찾는 양반집에 딸을 주겠다는 혼처(婚處)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심학자(沈學子)라고 하는 사람에게 과년(瓜年)한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가정 형편이 어려워 누가 중매를 서려 하지 않았다.
  심학자가 탄식을 하니 부인이 말했다.
  “저 황직장(直長) 댁에 딸을 시집보내면 우리도 살림이 펴질 텐데…….”
  옆에서 듣고 있던 딸도 그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요. 그 집에 저를 시집보내 주십시오. 시집가면 최선을 다하여 그 집안의 예의를 따르겠습니다.”
  심 학자는 펄쩍 뛰며 말했다.
  “얘야. 네가 며칠 굶더니 무슨 헛소리냐? 배운 게 없는 네가 그 집에 시집가면 봉제사(奉祭祀), 접빈(接賓), 음식 장만, 그리고 많은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어찌 감당하려고?”
  “아버지 이 세상에 완전한 예의는 없습니다. 평소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온 제가 왜 예절이 없다고 하십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저 피나무로 만든 도마 하나와 식칼 하나, 베보자기 하나만 준비해 주십시오.”
  “아니, 그것은 어디에 쓰려고?”
  “예. 필요한 데가 있을 것 같아 그러하오니 준비가 되거든 그 집에 청혼을 해주세요.”
  그리하여 예의만 찾는 양반집에 가난한 선비네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다.
  혼례가 치러지고 그 이튿날,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새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아침 사관(仕官:윗사람께 드리는 문안인사)을 오지 않는 것이었다.
  ‘에햄, 새 며느리가 오면 이런저런 예절교육(禮節敎育)을 시켜야지.’ 하고 잔뜩 벼르고 있던 시아버지가 참다 못해서 소리를 질렀다.
  “거, 며늘아이 수모(手母: 수발하는 여자) 있느냐? 아직도 새 아이가 사관을 오지 않는 연고가 무엇인고?”
  급하게 새 며느리에게 다녀온 수모가 말했다.
  “예. 새아씨가 자기 집 예문(禮文: 예의 법도)은 윗사람이 사관을 받으려면 먼저 사당에 가서 조상님께 예를 올리고 나서 받는 법이어서 시아버지께서 사당에 다녀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음, 옳은 말이다. 대단한 예의가문이로구나. 그럼 내 얼른 사당에 참배를 하고 오마.”
  그런데 때가 섣달 雪寒風이 몰아치는 때여서 노인이 뒷산 중턱에 있는 사당에 다녀오려면 대단한 고행이었다. 더구나 언덕길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칠십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절을 받기 위해서는 빙탄 비탈길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눈길에 자빠지고,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온몸 어디 한 군데 온전한 데가 없었다.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고, 감기까지 걸려 기침도 도져왔다.
  간신히 다녀와서 막 따뜻한 아랫목에 누우려고 하는 순간 새 며느리가 어느새 들어와서 아뢰었다.
  “아버님, 사당에 다녀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사관 받으시옵소서.”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목소리로 문안을 드리니,

‘아. 과연 선녀 같고 예의바른 우리 며느리로구나!'

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온 삭신이 아픈 것은 어절 수 없었다. 그는 어기적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사관을 받았다.
  ‘오늘은 억지로 사관을 받았지만 내일 아침은 어쩌지? 저 눈길에 그 높은 사당을 또 다녀와야 된단 말인가?’
  시아버지는 걱정이 앞섰다. 하여튼 그렇게 겨우겨우 사흘 동안 사관을 받고 난 황 직장은

‘아이구 사관 받다가 내 명대로 못 살겠구나.’

하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마누라를 시켜서 당장 사관을 그만두라고 하니까 며느리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관은 석 달 동안 쉬지 않고 드리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응? 석 달? 아가, 내가 제발 빈다.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아니옵니다. 명망 높은 집에서 사관을 사흘밖에 안 하다니요. 자손들에게 부그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아이구, 이러다가 내가 지레 죽겠구나.”
  “아버님. 예의는 지켜야 하겠지만 죽은 조상보다 살아계신 부모님이 더 소중하니까 그럼 아버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몇 달 후, 황 직장의 아버지 제삿날이 돌아왔다.
  “아가, 오늘 저녁에 너희 시할아버지 기고(忌故. 제사)가 있으니 제수를 장만하도록 해라.”
  “예. 그럼 어머님! 평소에 쓰시던 도마하고 칼을 주십시오.”
  “아니.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저는 제사용 도마와 칼은 평소와 달리 따로 사용하라고 배웠습니다. 평소 쓴 것, 짠 것, 비린 것, 산에 들에 강에 바다에서 난 온갖 것을 썰고, 저미던 잡스런 도마에 어찌 신성한 제사 음식을 썰겠습니까?”
  “그도 그렇겠구나. 그런데 아가, 내가 미처 그런 도마와 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리 될 줄 알고 제가 피나무도마와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희집은 과연 예의가 대단하구나.”
  “뭘요. 저희 아버지는 이런 것은 상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런 집안에서 며느리를 데려오다니 가문의 영광이로다.”
  그날 밤, 제사 상을 차리는데 진설법(陳設法)이 영 달랐다. 며느리는 조율이시(棗栗梨柹), 홍동백서(紅東白西)가 아니라 빨간 음식은 빨간 것끼리 모아 놓고, 흰 것은 흰 것대로 모아 놓는 것이었다.
  “얘. 아가! 이것은 누구의 진설법이냐? 희한하기도 하다.”
  “아이구. 아버님 이것도 모르십니까? 주자(朱子) 선생의 진설법 아닙니까?”
  “아. 우리는 공자님 진설법으로 해왔는데…….”
  “주자님이 공자님의 법도를 고쳐 놓지 않았습니까?”
  “음, 그럼 이제부터는 우리 가문도 주자법을 따라야 하겠구나!”
  황 직장은 며느리가 가르쳐 주는 대로 따르는 신세가 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첫 벼를 베려니까 며느리가 말했다.
  “아버님. 제미(祭米. 제삿쌀)를 먼저 장만하셔야지요.”
  “그냥 한꺼번에 추수해서 나누어 쓰면 되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버님. 저희 집 예문(禮文)에는 꼭 첫 곡식을 따로 추수해서 제미로 씁니다. 사대봉사(四代奉祀)이니, 여덟 번 차려야 되니까 여덟 봉지를 베 보자기에 따로 싸서 보관해야 합니다.”
  “과연 예의바른 집이로구나.”
  그런데 제미(祭米)를 여덟 번이나 따로따로 말리고 담으려니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며늘아가, 가가례(家家禮)란다. 집집마다 예절이 다른 법이니 지금부터는 너희 집 예문을 들먹이지 말고 우리 집 예절에 따라 사는 것 또한 예의일 것이니라. 그러니 너무 예절을 따지지 말고 편리하게 살자꾸나.”
  그 뒤부터 며느리는 예절 때문에 시달리지 않았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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