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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소개
논어(論語)는 孔子와 그의 弟子들의 語錄을 엮은 經傳이다. 孔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弟子들이 그의 言行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
(☞논어는 공자의 제자에서부터 그 제자 대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서,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서 완성된 것으로 推定된다. 특히 개중에서도 有子를 거쳐 曾子의 계열에서 현재의 논어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논어에서 공자를 제외하고 子가 붙는 이가 둘이 더 나오기 때문. 그게 바로 유자와 증자다.
한편으로 공자 생전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져있고, 안회나 자공 등에게는 子를 안 붙이는 것을 보아 초기 버전은 공자의 제자 대에 만들어졌고, 改定버전이 유자->증자계열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왈파편(공자 생전의 말)을 달리 모아둔, 공자 제자대에 이미 완성된 논어의 원형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
(☞웬만한 사상가나 종교의 교조는 스스로 책을 쓰는 일이 없다. 꾸란도 무함마드가 한 말을 후세에 정리한 것이고,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석가모니의 불경도 그렇다. 하다못해 공자와 비견될 만한 소크라테스도 <변명> 등에서 플라톤에 의해 그 사상이 쓰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기에 후세의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주장이 재단당할 확률도 없지 않게 있고, 그래서 욕도 먹는 게 사실이다. 초대형 규모의 사상집단의 교조급이 직접 자료를 남기는 경우는 기껏해야 도가의 노자가 남긴 노자(도덕경) 정도. 그마저도 사후에 도가가 다른 형태로 흘러가면서 종교화된 것이라 이마저도 얘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
논어의 최종 버전은 공자 학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증삼의 제자들이 완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전 20편, 482장, 600여 문장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본래 버전은 齊논어, 魯논어, 古文논어 세 종류였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노논어의 교정본이다.
2. 논어의 여러 버전
2천 년 이상 된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짜깁기를 통해 완성되어 왔다.
논어라는 책이 제작된 건 최소 세 차례, 수백 년간으로 보인다.
1세대 편집자는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직계 제자,
2세대는 유자, 민자 등의 직계 제자,
3세대는 전국시대 맹자나 동시대, 혹은 맹자 사후의 제자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이오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논어와 제논어를 모두 담게 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춘추좌씨전(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前漢代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원래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미 한나라 대에 세 가지 버전의 논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지라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魯論語)와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齊論語), 그리고 한경제 때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古論語)가 그것이다.
현재 전해져 우리가 보는 논어는 전한의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하여 장구(章句)를 나누고, 제논어의 내용을 첨가한 통합본이다.( ☞《논어장구》(論語章句), 혹은 《장후론》(張侯論)이라고도 한다.)
하안은
“제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논어보다 2편이 많다.”
라고 했는데 최근 해혼후묘에서 지도(知道)편으로 추정되는 죽간이 발견되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에 대한 주석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공안국, 마융, 정현 등이 주석을 달았으나 지금 전해지지는 않으며, 위나라(魏)의 하안이 이를 바탕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이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간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저술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형병이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저술하였는데 모두 《논어집해》에 대한 재해석에 해당한다.
이 중 형병의 《논어정의》는 북송대에 《논어집해》와 함께 십삼경주소에 포함되었다.( ☞'경문(대문)-집해(대주)-정의(세주)'의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읽혔던 것이 바로 이 《논어주소》(論語注疏)이다.
《논어의소》의 경우에는 현학적 경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하겠으며, 형병의 경우에는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여기까지를 일반적으로 고주(古註)라고 한다.
이후 남송의 주자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을 신주(新註)라고 한다.
여기에는 《논어주소》의 설은 물론, 정호(程顥), 정이(程頤), 사량좌(謝良佐), 장식(張栻), 범조우(范祖禹) 등 송대 유학자의 설이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었던데다가, 원대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논어집주》는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논어 주석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후 청대에는 고증학이 발달하였고, 이러한 고증학적 성과들이 경전 독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유보남의 《논어정의》(論語正義)가 그러한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주석이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정수덕의 《논어집석》(論語集釋),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注) 역시 중요한 주석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정약용이 일본 에도 막부의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를 썼다.
다만 조선시대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는 경우에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주로 읽는다. 조선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의 근간은 주희의 성리학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인물 및 저작들은 서로 살았던 시기가 심하면 1500년은 훌쩍 차이나며 학문관도 그만큼 상이하므로, 같은 논어임에도 결코 비슷한 종류의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3. 내용과 특징
공자의 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니 난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고 한마디 했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을 했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한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이 경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역시 정확한 맥락이 어땠는지는 영영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어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와닿지를 않는다.
하기사 2천 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니 이해하기 쉬울 리가 있을까. 더구나 한문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 같은 경우는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 남에게 전하고도 자신은 익히지 못했는가?
- 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 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 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다만 조선시대로 한정하면 사실상 주자의 주석이 절대기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보면서 공부한다면 크게 혼란스러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 순서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드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다. 簡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때문에 길이를 줄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일단 이를 암기한 다음 그 해석을 배우는 식으로 가르침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는 남아도 말은 흩어져 사람마다 경전의 풀이가 달라지게 되었다.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 부분이 소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해석을 구전의 영역에 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정한 체계와 연속성이 있다면 오히려 문자 기록만 남아있을 때보다 구전이 더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유명한 사해문서이다.
사해문서는 구전으로 이어져 온 경전이 오류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천여 년이 지나도록 거의 비슷하게 보존한 사례이다.(☞死海文書: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구약성서 사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이라 본문비평학에서 중시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오래된 완전한 구약성서가 1008년에 쓰인 레닌그라드 사본인 것을 생각하면 사해문서의 대단함을 알 수 있다.
1946년 말 또는 1947년 초 이스라엘의 소금호수 사해 인근 쿰람 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를 시작으로 사해 인근에서 발견된 일련의 히브리어 성서이다.
에세네파 수도승이 당시 판 치던 도적 떼의 손으로부터 문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히 맞춰진 가죽상자나 점토항아리에 자신들이 기록한 글과 성경 사본을 사해 주변에 위치한 사암 동굴들에 숨겼다고 추정된다.)
그 외에도 《논어》는 여러 단문의 모음집이라 앞 내용과 뒷 내용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으면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한 예로 《맹자》 양혜왕 편을 들 수 있다.
"'처음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 순장에 사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손이 끊어져 후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으니"
공자의 순장에 대한 적개심을 알지 못한다면 이해가 힘든 부분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하에 전개된 노자나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원전 하나만 파도 이해가 되지만, 《논어》는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 명언 모음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 면에서는 일부 난해한 비유들을 제외하면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그 때문에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전인 것이다.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
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사실 이건 유교에 대한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꿰뚫는 일정한 사상하에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완독 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4. 편제
논어의 편제는 모두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의 제목은 무슨 거창한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각 편의 맨 첫 단락 중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子曰)'을 제외한 구절을 따서 붙인 것이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 수가 적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 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에서 공자의 일상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므로, 추가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여하간 상론이 먼저 쓰여진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상론(上論)
학이(學而) - 논어의 첫 편. 내용이 배우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다.
위정(爲政) - 주로 올바르게 정치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팔일(八佾) - 편의 제목인 '팔일'은 주나라 천자가 제사를 지내면서 추도록 하는 천자의 무악으로 한 줄에 8명이 8줄로, 총 64명이 서서 추는 것이다. 이 춤을 노나라의 일개 대부인 계손씨가 자기 집안 제사에서 추게 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예절이 무너지고 법도가 무너지는 춘추시대 말기의 사회상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후는 6일무, 대부는 4일무까지만 시킬 수 있다.)
이인(里仁) - 선비가 살아가면서 처신해야 할 몸가짐을 설명한 편.
공야장(公冶長) -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옛날과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평가가 주로 실려있다. 주자는 이편을 자공의 제자들이 지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옹야(雍也) - 전반부는 공야장편과 비슷하게 인물평가. 후반부에는 주로 올바로 아는 것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술이(述而) - 공자가 남을 가르치는 내용과 평소 행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편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이후 동양 역사학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태백(泰伯) - 공자가 구상한 이상적인 정치상을 설명하는 편.
자한(子罕)
향당(鄕黨) - 공자의 공사생활에서 드러난 행동거지에 대하여 기록한 편. 공자가 말한 것보다는 공자의 평소 행실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은 편이다.(☞예를 들면, 똑바로 썰지 않았거나 너무 익혔거나 덜 익힌 음식은 손도 대지 않는 공자의 성향이라든가, 반드시 겉옷과 똑같은 색깔의 가죽옷을 골라서 입고 나가는 습관 등등.)
하론(下論)
선진(先進) -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의 장단점을 평가한 편. 민자건을 민자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이 편은 민자건의 제자가 지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안연(顔淵) -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이 첫머리에 등장한다. 주로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이 나온다.
자로(子路) - 열혈 제자인 자로가 첫머리에 등장하는 편. 내용 구성은 안연편과 비슷하다.
헌문(憲問)
위영공(衛靈公)
계씨(季氏) - 이 편을 제나라 논어로 따로 보는 논의도 있다.
양화(陽貨)
미자(微子) - 성현들의 벼슬살이에 대한 내용.
자장(子張) - 공자의 말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편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한 말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편인데, 이 중에서 자하와 자공의 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요왈(堯曰) - 논어의 마지막 편이며, 3장으로 가장 내용이 짧다.
4. 여담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엄 에드워드 수틸(1861~1935)이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번역했다.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
는 부탁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양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
라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참고로, 이이의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한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 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 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학문 중 하나이었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하였다.
5. 관련 한자성어
見利思義
見危授命
過猶不及
怪力亂神
巧言令色
道聽途說
無知蒙昧
殺身成仁
述而不作
溫故知新
任重道遠
切磋琢磨
簞食瓢飮
志于學
而立
不惑
知天命
耳順
從心所欲不踰矩
苛斂誅求, 苛政猛於虎: 이건 논어가 아니라 예기에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역시나 공자와 관련된 유명한 고사성어다.
그리고 이단(異端), 菽麥도 원래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6. 외부 링크
동양고전종합DB
논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
논어집주 서설
논어의 문법적 이해 - 네이버 지식백과
7. 관련 문서
유교
유학(동음이의어)
공자
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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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문화어: 론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四書의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 놓은 성격을 띤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1.구성
현재 《논어》는 전20편, 482장,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2.역사
공자의 삶과 행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널리 읽어온 책이 《논어》다.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만들었는지 아직 정설이 없다.
하지만 《논어》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책이 공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고 자신들의 얘기를 첨가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 그의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교육에 종사했는데, 여러 곳에서 스승의 말을 죽간 등에 기록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고 이것들을 나중에 모아서 편찬했을 것이다.
최종 정리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증삼의 제자들이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의 6대 경제(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인다.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 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내용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 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 수가 많다.
또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인데도, 하론 10편이 또 있으니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至難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논어》 20편의 구성
상론(上論) 하론(下論)
제1편 학이(學而) 제11편 선진(先進)
제2편 위정(爲政) 제12편 안연(顔淵)
제3편 팔일(八佾) 제13편 자로(子路)
제4편 이인(里仁) 제14편 헌문(憲問)
제5편 공야장(公冶長) 제15편 위령공(衛靈公)
제6편 옹야(雍也) 제16편 계씨(季氏)
제7편 술이(術而) 제17편 양화(陽貨)
제8편 태백(泰佰) 제18편 미자(微子)
제9편 자한(子罕) 제19편 자장(子張)
제10편 향당(鄕黨) 제20편 요왈(堯曰)
이중 대표적인 학이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4. 주석서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의 《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의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이토 진사이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5. 영향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A.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엄 수딜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교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볼테르는 계몽철학자로서 '《논어》'야말로 당대까지의 허황된 형이상학이나 신학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철학서라고 칭송하며 자신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둘 만큼 공자를 존경하였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몽 레스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평했다.
2023.3.19 古岸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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