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同散異

육적(陸績)과 육적회귤(陸績懷橘)

耽古樓主 2023. 2. 26. 06:37

육적(陸績, 188~ 219)은 중국 후한 말의 관료이자 학자로, 자는 공기(公紀)이며, 오군 吳縣 사람이다.
육적은 육손의 당숙이다.

126년생인 아버지 육강이 62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다.

때문에 堂姪인 육손이 육적보다 5살 많다.

陸績懷橘(육적회귤)

 

1. 생애


(1) 懷橘의 古事

육적이 6(193) , 구강에서 袁術을 뵈었다.

술이 귤을 내왔는데, 육적은 그 중 셋을 품에 넣었다.

육적이 떠나면서 원술에게 배례를 하다가. 귤을 땅에 떨어트렸다.

원술이 육랑은 손님으로 왔으면서 왜 귤을 품었지?”라고 묻자,

육적은 돌아가서 어머니께 드리고자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원술은 이 대답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다.

원나라 郭居敬이 지은 二十四孝에도 이 일화가 수록되어, 훗날 회귤고사”, “육적회귤”, “회귤이라 하여 지극한 효성을 일컬을 때 인용되었다.

(2) 손씨를 섬기다

이후에 원술은 군량 요청을 거절한 육적의 아버지 육강에게 화가 나서 손책을 시켜 육강을 공격하게 한다.
육강은 육적, 육손 등 육씨 일족을 모두 오현으로 피난시킨다.

육강은 손책에게 성이 함락되고 사망하며, 손책은 원술에게 약속받은 여강태수 자리를 유훈이 가져가자 분노하고, 이는 손책이 독립하는 계기가 된다.

孫策은 오군에 있으면서, 張昭, 張紘, 秦松을 상빈으로 모셨다.

이들은 사해가 아직 태평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무력으로써 다스려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육적은 나이가 어렸는데, 멀리서 크게 외쳐 管仲과 齊桓公의 패업과 孔子의 말을 들어, 이들이 덕이 아닌 무력에 의한 통치만을 주장하는 것을 비판하여 장소 등을 놀라게 했다.

육적은 용모가 웅장하고 박학다식하여, 천문, 역법, 산술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虞翻은 옛날부터 명성이 있었고, 龐統은 형주의 유명한 선비인데, 모두 육적과 친교를 맺었다.

(3) 방출, 저술, 죽음

孫權이 정사를 통괄하게 되자 육적을 초빙하여 주조연으로 삼았으나, 직선적인 태도로 인해 꺼림을 받게 되어 울림태수로 전임되고, 편장군을 더하여 병사 2천 명을 받았다.
육적은 다리에 병이 있었고, 선비로서 학문에 뜻이 있었으므로, 병사를 거느리고 싸우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육적은 군무 중에서도 저술을 폐하지 않아, 혼천도를 짓고, 주역에 주를 달고, 태현을 풀이했는데, 모두 세상에 남았다.

육적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사를 지었다. “한의 지사 육적은 어려서는 시경, 상서를 익혔고, 장성해서는 예기, 주역을 익혔으나, 명을 받아 남정하던 중, 질병에 걸려 위독해졌구나! 내가 만난 수명은 길지 못하니, 오호라, 세상과 격리됨이 슬프구나!”

육적은 32세에 죽었는데 이때 말했다.
지금부터 60년이 지나면, 수레는 궤를 같이하고, 글은 문자를 같이할 것인데, 이를 보지 못하니 원통하구나!”
진시황이 6국을 멸한 후 문자와 수레바퀴의 폭을 같게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중국 통일을 뜻한다. 실제로 진나라에 의한 통일이 280년에 이루어지니 매우 가깝게 예측한 셈이며, 만일 육적이 이 시기까지 살았다면 93세가 된다.

2. 인물평

陳壽의 평: 진수는 육적을 높게 평가하여, “양웅의 태현에 대한 육적의 공적은 중니(공자)춘추에 대한 좌구명의 공적이나 노담(노자)도덕경에 대한 장주의 공헌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고, 손권의 인사에 대해서는 이처럼 귀중한 인재에게 남월을 지키게 한 것은, 또한 인재를 해친 것이 아닌가!”라고 평했다.

방통의 평: 방통이 周瑜의 상여를 운구해 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창문에서 육적, 顧邵, 全琮과 함께 모였다.
방통은 이 세 사람을 평하였는데, 육적에 대해서는 굼뜬 말이라 할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이 있다.”라고 평했다.
육적은 고소와 함께 천하가 태평해지면 경과 더불어 사해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3. 《삼국지연의》의 기술

삼국지연의에서는 제43회에서 諸葛孔明이 동오를 찾아와 선비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薛綜이 공명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공명의 대응에 부끄러워하자, 육적은 曹操는 전한의 공신인 曹參의 후예이지만 劉備는 황실 후예라는 것도 별 근거가 없고, 고작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사람인데, 어떻게 조조와 함께 설 수 있겠냐고 공격했다.
공명은 유비가 황실의 후예임은 황실이 인증한 바며, 조조가 조참의 후예라면 지금 조조가 황제를 끼고 전횡을 부리는 것은 한실에는 역적이고 조씨 가문에는 패륜아가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전한의 고조 劉邦은 고작 정장의 지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유비가 돗자리나 짚신을 짜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육적은 말문이 막혀 답하지 못했다.
회귤 고사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다만 공명은 자신을 공격하는 육적에게 대답할 때 육적을 가리켜 공은 원술 앞에서 귤을 품었던 육랑이라고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