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太史公曰:
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黃帝로부터 太初에 이르기까지의 史實을 歷述했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史記) (太史公自序)
▶ 太初: 한무제의 일곱 번째 연호. 한무제는 총 11개의 연호를 썼는데, 태초는 기원전 104~101년에 사용되었다.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24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유일한 通史이다. 고대~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서의 틀을 만들어낸 책으로 손꼽히며,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이자 중국 24史의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역사서 서술의 대표적 방식 중 하나인 紀傳體 양식을 성립한 사서이기도 하다.
2. 편찬 배경
중국 전한의 사마천이 상고 시대의 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했다. 본격적인 저술은 기원전 108년 ~ 기원전 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사마천의 아버지인 司馬談 代에서부터 자료가 준비되었으리라 본다면 저술에 들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史官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승하고, 아울러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함
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룸
으로 각각 설명하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 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 史官: <太史公自序>에서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사관을 세습한 집안임을 밝히고 있다. 원래 아버지 사마담이 사서를 저술하려 했으나, 역사 기록과 함께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太史令의 직책에 있었음에도 한무제의 封禪儀式을 수행하지 못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사마천에게 사서 저술을 당부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史記'라는 이름은 한나라 사람들이 사마천의 《사기》 이전에 쓰이던 歷史書를 부르던 명칭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본래 이름은 《太史公書》로, 후한 말에 《太史公記》로 바뀌었다가 이후 사람들이 《史記》라 줄여 사용했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드물다.
《史記》의 의미를 살펴보면, 記는 글자 그대로 기록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史의 원래 의미는 《說文解字》에 記事者라고 하여 사기란
'문자를 이용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
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아는 '역사'(history)란 개념이 아닌, 직책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史記》라는 제목은
기록하는 직분을 맡은 사관(史官)이란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다.
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기》의 영문 번역명은 'Records of the History'가 아닌 'Records of the Great Historian'이다.
단, 분량 자체는 편수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많지는 않은 편인데, 현재 원문만 번역하여 낸 것이 6권 정도 분량이며, 원문은 글자수로만 따지면 526,500여 자로 24사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송사》의 1/4 수준이다. 참고로, 편년체 통사인 《資治通鑑》(총 294권)은 번역본이 30권이 넘는다. 물론 《사기》를 실제로 읽어 보면 결코 분량이 적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책의 한 '卷' 또는 '篇'은 요즘 책의 한 '章' 정도 분량이었다. 焚書坑儒와 楚漢戰爭을 거치며 原史料 다수가 燒失된 원인도 있지만,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蔡倫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이라서, 필연적으로 부피가 큰 簡牘에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적절한 부피로 나눈 각 '편'의 분량은 적음이 당연했다.
사마천이 宮刑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쓴 책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고자로 만든 한무제를 비판했다. 사실 한무제에게 공격이 집중되긴 했지만 역대 중국 왕조와 비교하며 한나라 자체도 매우 비판한 편이다. 다만 현재의 황제를 비판한 부분은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도 있다.
▶ 사마천이 국가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 절대 다수가 한무제 때 사람들이며, 창업자의 최대 적수였던 항우를 <열전>이 아닌 <본기>에 기록했다.
3. 서술상의 특징
3.1. 최초의 紀傳體 사서
《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니라,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따로 기술하는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역사서이다. 이후부터 분열기를 통일한 통일 왕조를 서술하는 데 있어 기전체의 장점이 부각되어, 중국 정사 24사를 비롯하여 고려의 《三國史記》, 조선의 《高麗史》 등이 모두 기전체로 쓰였다. 특히 《사기》는 사서로서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력도 뛰어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높은 수준이다.
또한 민중과 사회에 대한 생동감이 뛰어나다. 중국에서 《사기》에 나오는 직업군에 대해 통계를 내봤는데 총 1,300여 가지 직업들이 언급되었다고 한다.
▶ 사마천이 <태사공자서>에 자신이 젊은 시절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체험했다고 소략하게 써 놓았는데, 이 경험이 《사기》를 쓰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本紀>·<表>·<書>·<世家>·<列傳>·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서 인물에 대한 기록은 <본기>·<세가>·<열전>이다.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및 전한대의 제후들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 일부 판본에서는 世家 대신 係家라고 쓰였다. 이는 誤字가 아니라 해당 판본이 당나라 시대 것이라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避諱한 것이다.
사마천은 夏 - 商 - 周 - 秦 - 漢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보아 하·상·주·진시황 일대기를 모두 <본기>에 서술했다.
3.2. 서술 태도 및 사상적 배경
후대의 역사책과 비교하여 특기할 점은 명분과 정치 이념보다 실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항우는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했다. 또한 전한의 제2대 황제인 혜제와 그의 뒤를 이은 제3대 황제 소제, 제4대 황제 소제 모두 허수아비 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본기>는 아예 없고, 대신 <여태후 본기>가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 후한대에 나온 《漢書》는 명분을 보다 중요시하여 항우는 <열전>에 넣고 혜제 대에는 <혜제 본기>를 따로 두었으며, 혜제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소제 시기만 <高后紀>에 포함하였다.
《사기》가 전한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 시기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단히 과감하게 처사한 것이다. 그만큼 항우와 여후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한 왕조 아래 살던 당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혹은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 왕조에 대해 심사가 좋지 못했던 점을 반영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 왕조의 찬양을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항우의 격을 너무 낮추면 그에게 항상 패배했던 고조 유방의 격도 덩달아 낮아지지만, 항우의 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를 敗死시키고 한 왕조를 창시한 유방의 격 또한 높아진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 것이다.
여후는 유방의 아내이고 제2대 황제의 어머니로 정치 쪽에서는 확실히 간섭을 많이 했으니 이를 완전히 숨길 수도 없었을 터이다.
<세가> 역시 실제로는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와 진승을 <세가>에 넣었음도 특이하다. 공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세가>가 아니라 <본기>에 서술된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이니 <세가>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追諡된 것이 前漢 末期였으니, 꽤나 先驅的인 태도임은 분명하다.
▶ 진승이 스스로 長楚를 세워 왕을 자칭했으나, 자칭 왕이면 왕이지 역시 제후는 아니다. 아마도 사마천은 진승을 제후로 인식하거나 제후급 영향력을 보였다고 평가하여 <세가>에 넣은 모양이다. 사실 한고조도 진승에게 왕위를 내리고 무덤을 관리하게 하는 등 대우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점은 儒學이 전한의 국가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로 유교의 정치사상인 '名分論'이 확립되던 때였다. 사기가 모델로 삼았던 《春秋》가 歷史批評書라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유교적 명분론을 담은 政治 哲學書로서 讀解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색적인 서술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 역시 《춘추》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긴 했다. 《춘추》를 두고 君臣·父子 모두 통달해야 할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는 유교적으로 접근함이 아니라, 공자가 세상만사를 褒貶함으로써 세상에 큰 가르침을 남기려 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마천은 도가를 상당히 중요시했다.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은 각 제자백가를 평가했는데 도가를 두고는 편애가 느껴진다. 사마천은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면 만물의 실체를 통달할 수 있으며 도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군주가 지켜야 할 법도라고 적었다. 유가·법가·묵가 등을 다룰 때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사정없이 드러내지만, 도가를 두고는 비판하지 않는다.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에 반해 <過秦論>이 유행하고 무위의 치를 높이 사는 黃老學이 유행했는데, 사마천 역시 이 영향 아래 있었던 모양이다. 궁형을 받는 것 역시 사마천이 유학자였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형벌이다.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실상 허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고제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의 시기 중에서 유교가 정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 시기는 없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실제 정치를 포함한 의식 세계의 본질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제11대 황제인 한원제 시기에 이르러서인데, 원제는 젊어서 유교에 심취했다가, 아버지 한선제가 이러다가 나라 망치겠다고 하여 황위에 오르지 못할뻔했다. 실제로 한원제 이전의 한나라 유학은 우리가 아는 유학과는 다른 냄새가 많이 난다. 단적으로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동중서는 <五行說>을 들고 나왔는데, 유가와 별개의 학설을 한무제의 지배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유가에 끌어다 붙인 것이었다. 사마천은 한대 유학이 내세운 (도참, 참위 등) 미신적인 믿음은 혐오했다. 이런 미신과 같은 유교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스며든 것은 실질적으로 신 왕조을 세운 왕망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만 사마천이 한대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先秦의 '유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했다. 젊어서 유학을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며, 공자의 《춘추》를 높게 평가한 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사마천은 어느 정도 유가적으로 《사기》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한나라의 유교는 이후의 유교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명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하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돈을 들여 관리 감독하는 책이라면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구성되겠지만, 국가가 본격적으로 감독한 것은 수·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법가사상에 대한 비판이 지배적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법치주의 비판이라기보단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항상 들어있다.
▶ 《사기》의 <酷吏列傳>에 수록된 12명의 혹리 중 10명이 엄벌주의, 원칙주의 등을 빙자한 편리주의를 한 것도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사마천은 그 10명은 비판하면서 나머지 2명인 郅都와 張湯에 대해선 '참혹하다' 등의 평가를 내리면서도 '공정했다'거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했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漢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 (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呂太后本紀〉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遊俠列傳〉, 〈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刺客列傳〉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 사이의 권력 다툼을 묘사한 〈魏其武安侯列傳〉이나, 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을 〈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구태의연한 영웅 중심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 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동평사왕 유우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合從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촉한의 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劉知畿가 편찬한 《史通》 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많은 지식인이 《사기》와 《한서》를 비교하고 분석하기도 했다.
3.3. 신뢰도
《사기》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商나라 관련 기술이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1,000년 가까운 간격이 있었던지라 《사기》에 서술된 상나라 기술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이고, 《사기》에 나오는 왕이나 사건들은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나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나 전설을 사마천이 집대성한 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가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즉, 이런 각 부분 부분에서의 실제 사실과의 일치가 종합적으로 모여 《사기》 전체의 신뢰도를 높여 주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즉위한 일부 군주들의 재위 기간의 오류 문제와 기록이 누락된 군주*와 <孔子世家> 등 몇몇 부분에서는 일부 기사가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하나*, 으레 그렇듯이 교차검증에서 걸리는 부분에 한정된다.
▶ 魏의 군주인 위혜왕과 위양왕의 재위기간의 오류 및 齊의 군주 田悼子와 제후섬의 누락으로 인해서 田齊 초기에 꼬여버린 군주의 재위기간 등.
▶ 사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될 만한 것이 <秦本紀>의 한 부분이다. 조고와 이사가 서로 짜고 시황제의 유서를 빼돌렸는지 안 빼돌렸는지는 동시대 인물들도 쉽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추가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 가능했겠냐는 의문과 가정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서를 부정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기에 기본적으로는 사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 외에 사마천의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현재 학자마다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 관련 연구서를 종합해서 낸 유리 파인스(Yuri Pines)와 로타르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등이 말하듯, 현재 학계의 잠정적인 합의는
《사기》의 왜곡과 오류에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사기》와 사마천의 커다란 공헌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도이다. 고고학과 출토문헌을 빼고, 전래 문헌만으로 중국 고대사를 재구성하기가 불가능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고전 역사서에 대한 의심은 유독 서구에서 자주 나오기에 자연스레 반발심이 나오는 편이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이런 성향이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도 있다.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의 성과와 출토 문헌의 활발한 활용은, 기존 전래 문헌의 신뢰성을 많은 부분 입증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래 문헌의 오류들을 상당 부분 입증하기도 하였다. 이는 《사기》 역시 마찬가지라 출토를 통해 정확성이 증거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류들 역시 발견되고 있다.
4. 후대의 평가와 번역본
물론 《사기》는 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전하지는 않는다. 당장 표제가 사마천이 실제로 붙였던 《태사공서》가 아닌 《사기》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列傳> 맨 마지막 부분인 <太史公自序>에
正·副 두 本으로 써서 正本은 명산에 보관하여 사라질 것에 대비하고, 부본은 京師에 보관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겠다.
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130권 가운데 <孝景本紀>, <孝武本紀>, <禮書>, <樂書>, <병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三王世家>, <부근괴성열전>, <일자열전>, <龜策列傳> 등 10권은 이미 전한 후기에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褚少孫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보충했다. 예를 들어 저소손은 <龜策列傳>을 시중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해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 보충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못 되어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사기》의 초기 역사는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最古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 유송 때 배송지의 아들 裴駰이 쓴 《史記集解》 130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脫簡·錯簡 또는 書寫할 때의 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수·당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났다. 당나라 때는 司馬貞이 《史記集解》를 근거로 《史記索隱》 30권을 짓고, 또 <三皇本紀>를 만들어 이에 주석을 붙였으며, 張守節이 다시 《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를 통틀어 사기 三家注라고 부른다. 2020년 한가람역사연구소 《신주사기》에서 삼가주, 삼가주석을 포함한 완역본이 처음 나왔다. 다만 한가람연구소는 그 악명높기로 유명한 이덕일 소장의 연구소로, 환빠적 민족주의 논리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고, 실제로도 서문에 강단사학 운운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사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 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는데, <항우본기>, <위공자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꼽았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조선 후기의 명군이었던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典範으로 호평하고* 《사기》에서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한 열전 27편*을 뽑아 《御定史記英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 정조는 당대에 유행하던 문장을 철저히 배격하고, 고문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 《한서》 <열전> 여덟 편을 더했다.
《三國志》의 왕윤은 채옹을 죽일 때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분명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그랬겠지만, 오히려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주는 장점이 되었다. 《사기》는 당나라 때부터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나라에서도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대상이 되었다. 당송8대가 중 한 명인 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柳宗元은 《사기》를 雄深雅健, 즉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나다.
고 평가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사기》를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나라 때 잠시 주춤했으나, 청나라에서는 紀昀과 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章炳麟도 《사기》와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魯迅은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 《漢文學史綱要》 -
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군주에 대한 기록을 다룬 <本紀>보다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룬 <列傳>이 좀 더 재미있고 읽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기>는 천자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고 있어서 연표에 따라 조금 딱딱하게 구성된 반면에, <열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을 다루고, 연도에 그리 얽매이는 편도 아니라 <본기>에 비해 덜 지루하며 더 생동감이 넘친다. 현장 답사 위주로 쓰여진 <열전>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로운 일화나 사마천의 생각, 인물평 또한 <열전>에 가장 잘 드러나 가르침 역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4.1. 가치
▶ 문학면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으로 '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역사면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관한 기술도 현재 알려진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4.2. 한국어 번역본
한국에 소개된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중요한 편만 추려내서 뽑은 것이 많다. 국내에 《사기》와 관련된 책을 보면 <열전>에서 추려낸 책이 대부분이다.
- 국내 최초의 《사기》 완역본은 김병총 혼자서 평역, 완역한(初譯: 홍석보, 解字: 정광) 집문당 출판사의 《사기》이다. 김병총은 혼자서 이를 다 평역, 완역했는데, 번역 자체는 가장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臺灣 예문인서관을 저본으로 했다. 국내 완역서는 총 10권으로 번역되었다. 다만, 보충 설명이 훗날 번역서처럼 각주 처리가 돼 있는게 아니라, 주로 ( ) 처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읽기가 조금 불편하다.
-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기》 완역판을 들면 까치글방에서 여러 학자들이 함께 전편을 완역해 낸 7권짜리 《사기》이다. 그러나 의역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정사 삼국지》를 번역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가 혼자 완역한 것을 민음사에서 출판한 것이 있다. 다만, 오역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 2015년에 기존에 번역한 것 중에서 <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오류를 수정하고, 미주였던 주석을 각주로 바꾸었다. - 이외에 고전 번역가 신동준이 2015년에 완역본 《사기》를 위즈덤하우스에서 출판했다.
- 《사기》 연구자인 김영수가 완역본을 출간 중이다.
- 글항아리에서 2012년 《수호전》(김성탄본) 완역본을, 2019년 《삼국지》 완역본을 출간한 송도진이 2019년 3월부터 2020년 8월 18일까지 중화서국에서 나온 점교본 24사 수정본과 비교하면서 원전 번역했다. 또한 현재 국내에 번역된 《사기》<열전> 중에서 가장 많은 주석을 달아서 연재했다. 주석은 삼가주만이 아니라 《자치통감》, 《한서》, 제자백가 등에서 중요한 내용과 실제 역사 고증, 출전, 현재 지명과 비교 등 엄청난 양의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20년 8월 26일에 출판을 위하여 삭제되었다.)
- 2020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가장 유명한 주석 세 가지인 삼가주 및 삼가주석을 포함한 《신주 사기》 완역본을 출간했다. 2022년 6월 현재 <표>, <서>까지 모두 완역한 상태인데, 편집 기관의 주관이 많이 들어가 있고, 이미 기존 완역본이 4~6종 이상 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는 게 내외 평가이다. 김병총이 1994년 1월 완역한 집문당 《사기》에 비하면 무려 30년이 가까이 늦은 것이다.
- 이외에 2005년 교수신문에서 고전 번역본들을 추천하는 기획 시리즈에서 서울대 이성규 동양사학과 명예교수(당시 동양사학과 교수)가 편역한 《사기: 고대 중국사회의 형성》이 완역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번역본으로 추천받기도 했으나, 완역이 아니고, 발췌본이라서 가치가 떨어진다. 번역도 지금 읽어보면 오류가 꽤 있다.
- 현재 시중에 번역 출판된 《사기》는 중역본이나 표절이 아니라면 보통 대만 동작빈이 주관한 것으로 유명한 藝文印書館의 판본이나, 1949년 중화서국에서 낸 표점교감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당시에 낸 표점교감의 불완전성이 지적되어 최근에 중국에서 '점교본 24사 및 《청사고》 수정공정'이 진행되어 최종본 정사를 만드는 작업이 이뤄지는 중이다. 그 결과 2014년에 《사기》 수정본이 나왔는데, 현재 시중에 나온 번역본들 중에서 이 수정본이 반영된 판본은 개정된 김영수, 한가람 번역본으로 보인다. 혹 현재 완역본의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판본 수정에 따라 새롭게 번역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아예 《사기》를 발췌 번역한 뒤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조화한 번역본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문열 《초한지》이다. 엉터리라고 욕먹는 《삼국지》와는 달리,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을 충실히 번역했다. 소설보다 정사에 가까운 번역서 수준이다.
5. 《사기》의 구성
"흩어진 천하의 옛 이야기들을 망라하되, 왕들이 일어난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관찰하며 사실 진행에 따라 고증해 간략히 삼대의 사실을 추구하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사실을 기록했는데, 위로는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12본기로 기록하되, 모두 조목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사적에는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연대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10표를 만들었다.
예악의 증감, 법률과 역법의 개정, 병권,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의 관계, 시대와 세상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8서를 지었다.
별자리 28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하나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천자를 보필하는 신하들을 이에 비유해 그들이 충신의 도리로서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
의로움을 따르고 재능이 빼어나, 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친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70열전을 지었다.
합해 130편, 526,500자이고, 이를 《太史公書》라고 부른다."
《사기》 <太史公自序>
▶現在 傳하는 《사기》는 555,660여 자 정도로 약 30,000자 정도가 더 많은데, 후대에 빠지고 더해진 결과다.
5.1. <本紀>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이다. 항우와 여태후가 <본기>에 들어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명분과 신분보다 그 인물이 끼친 영향력과 업적을 중시한 사마천이기에 위의 두 인물이 편입될 수 있었다.
<三皇本紀>: 삼황오제 중 '3황'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동이족 태호 복희로 시작하는 삼황을 허구로 단정하여, 삼황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司馬貞이 《史記索隱》에서 《竹書紀年》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三皇本紀〉를 짓고 〈序〉도 곁들였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쓴 정식 12본기는 아니며, 천황, 지황, 태황(인황), 그 외에 복희, 여와, 신농, 축융, 황제 등이 3황으로 꼽힌다.
<五帝本紀>: 삼황오제 중 '5제'에 대한 기록으로, 사마천이 쓴 정식 12본기 중 첫 번째 기록이다. 오제가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본기>에서의 오제는 황제·전욱·제곡·요·순이다. 다만 현재의 <오제본기>는 사마천 당대의 것이 아니라 당나라 때 그 이전에 소실되어 버린 해당 부분을 재판한 것이다. 후대의 주석에서는 소호(금천)를 5제에 넣기도 한다.
<夏本紀>: 선조인 황제부터 곤(鯀)까지의 가계 및 1대 우왕에서 17대 걸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부분 《書經》의 <하서>를 배낀 것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서경》의 각 편이 어떤 이유로 편찬되었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殷本紀>: 시조 설(契)이 성씨를 하사받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1대 탕왕에서 30대 주왕까지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 또한 《서경》의 <상서>를 베낀 것이다. 역시 각 편의 편찬 이유도 기록했다.
<周本紀>: 시조인 후직 이후의 가계 및 고공단보의 건국, 1대 무왕에서 37대 난왕까지의 역사를 기록.
<秦本紀>: 선조인 전욱부터 이어지는 가계 및 1대 양공에서 30대 장양왕까지의 진의 역사를 기록. 진시황 이후는 <秦始皇本紀>로 따로 편찬했다.
<秦始皇本紀>: 진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의 역사로, 시황제, 2세황제, 진의 멸망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項羽本紀>: 패왕으로 불렸던 항우의 일대기. 황제가 되지 못한 항우를 황제처럼 <본기>에 넣었다. 《사기》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高祖本紀>: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 유방이 거병하기 전 시절부터 중국을 재통일하고 붕어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呂太后本紀>: 고조 유방 사후 즉위한 혜제, 두 명의 소제 시대에 실권을 장악한 여태후의 일대기. 정식 황제가 아닌 실권자를 <본기>에 기록한 특수한 기록이다.
<孝文本紀>: 여태후 사후 즉위한 효문제 유항의 일대기. 유항의 代王시절부터 기록하고 있다.
<孝景本紀>: 문제의 뒤를 이은 효경제 유계의 일대기. 원본이 소실되었기에 후대의 어느 인물에 의해서 보충한 것이 전해온다.
▶《西京雜記》의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이 <孝景本紀>에 경제와 무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자 무제가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 버렸다는 설이 있다.
<孝武本紀>: 경제의 뒤를 이은 효무제 유철의 일대기. 《사기》 <태사공자서>의 해제에는 <今上本紀>라고 되어 있다. '효무'는 무제가 죽은 뒤에 붙여진 시호이고, 사마천은 한무제 시절에 《사기》를 완성했으니 <금상본기>라고 칭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데, 이렇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마천이 직접 만든 <금상본기>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가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일부러 이렇게 제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현전하는 《사기》의 <효무본기>는 저소손이 <봉선서> 일부에서 내용을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효무본기>의 내용이 봉선 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찬 이유가 무제의 경우, 수십 년 제위에 있으면서 한 것이라고는 사치스럽게 제사를 지낸 것밖에 없다는 사마천의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5.2. <表>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즉, 연표이다.
<三代世表>: 하, 은, 서주 시대의 연표.
<十二諸侯年表>: 춘추시대 주요 12제후의 연표.
<六國年表>: 전국시대 주나라와 전국칠웅의 연표.
<秦楚之際月表>: 진 2세황제 이후와 초한쟁패기의 연표.
<漢興以來諸侯年表>: 고조 원년 이후 한나라 왕국들의 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전한 개국 공신들의 연표. 개국 공신 서열이 열거되어 있다.
<恵景間侯者年表>: 혜제부터 경제까지 제후들의 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한무제 원년부터 태초 연간(기원전 104년~101년)에 이르는 시기에 분봉된 제후들의 연표.
<建元已來王子年表>: '건원이래'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元光 5년부터 元鼎 원년까지, 즉, 기원전 130년~116년에 분봉된 제후들의 아들들에 대한 연표로, 연표 중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전한 건국 이후 여러 장수, 재상, 명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연표인데, 서문이 없고 거꾸로 된 글자가 많아, 위작 시비가 많은 항목이며, 대체로 梁玉繩의 견해에 따라 한무제 이전의 기록은 사마천이 썼고, 저소손 등이 실전된 부분을 보충하는 한편, 한무제 시기의 연표도 새로 넣었을 것으로 본다.
5.3. <書>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이다. 후대 역사서들의 <志>에 해당된다. 내용의 손실이 극심했는지, 사마천이 쓴 목록과 현재 남은 목록이 비율상 가장 많이 다른 부분이다. 현재 남은 부분은 후대에 자료를 수집해서 채우고,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아예 새로 쓴 것들이다. 원래는 <예서>, <악서>, <병서>, <율력서>, <천관서>, <하거서>, <봉선서>, <평준서>의 순서대로 있었는데, <예서>, <악서>, <병서>는 망실된 뒤 <예서>와 <악서>는 다른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졌으나 <병서>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또한 <율력서>가 <율서>와 <역서>로 쪼개져 8서 체제를 갖춘다.
<禮書>: 예의범절이나 이와 관련한 풍속 기록을 담고 있는데, 《史記志疑》에서는 <예서>는 《순자》의 <예론>과 <의병>편의 내용을 참조하여 후대에 새로 쓴 것으로 본다.
▶史記志疑: 청대의 고증학자 양옥승(梁玉繩)이 《사기》의 내용을 분석한 사료 비판서.
<樂書>: 음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사기지의》에서는 현전 <악서>를 《예기》의 <악기> 편을 참조해 후대에 새로 쓴 것으로 본다.
<律書>: 병법이나 군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사라진 <병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나, 후반부는 音律에 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후대에 재구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暦書>: 역법과 관련된 기록으로, 특히 한무제 연간의 역법 개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天官書>: 천문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당시 천문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은 물론, 당시 성행하던 天人感應의 개념과 맞물려,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사상적으로 규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封禪書>: 종묘나 제사 관련 내용으로 한무제 시기의 내용은 <효무본기>의 내용과 동일하다.
<河渠書>: 治水사업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한서》의 <溝洫志>, 《송사》, 《금사》, 《원사》, 《명사》의 <河渠志>로 이어졌다.
<平準書>: 재정과 경제 관련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한서》 <食貨志>로 이어져, 이후 정사들이 다루는 <식화지>의 모범이 되었다.
5.4. <世家>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제후들 및 전한의 황족, 제후들과 고관들의 기록이다. 여기에 공자와 진승이 포함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오·초·월의 경우 이리저리 윤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기》를 본따서 만든 《삼국사기》에는 제후국이 따로 없었던 만큼 <세가>가 없으며, 중국의 정사 또한 한나라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된 관계로 제후가 독립적인 통치 권한이 없는 작위에 불과하게 되어 대부분 <세가>를 생략했다. 반면 제후를 자처한 조선에서는 《고려사》를 쓸때 <본기>를 없애고, 고려 왕사를 <세가>에 적었다.
<吳太伯世家>
주문왕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아우인 계력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겨 남방의 오랑캐 땅으로 들어간 태백과 중옹 형제가 세운 오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자손이 없었던 태백의 뒤를 이은 중옹부터 부차까지의 오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齊太公世家>
강태공이 분봉을 받은 제나라, 일명 강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태공 때부터 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魯周公世家>
주문왕의 아들 주공 희단이 분봉받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주공부터 경공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燕召公世家>
주문왕의 아들 소공 희석이 분봉받은 연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소공 석부터 연왕 희, 태자 단 부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管蔡世家>
주문왕의 아들 관숙선과 채숙도가 분봉받은 관나라 및 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관숙선과 채숙도는 주문왕의 아들이자 곽나라에 분봉을 받은 곽숙처, 상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과 함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주모자였던 관숙선과 무경은 처형당하고 참여는 했지만 애매한 포지션이었던 채숙도는 유배, 말 그대로 참여하고 행동은 안 한 곽숙처는 면직되었다. 관숙선은 자손이 없어서 관나라는 폐지되었고, 채나라는 채숙도가 유배지에서 사망한 후 아들 채중호가 다시 분봉받아 이어나갔다. 관나라의 역사 기록은 분봉 이후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가 관숙선이 피살되고 자손이 없어서 나라가 폐지된 기록뿐이지만 채나라의 기록은 채숙도부터 채후 제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주문왕의 아들 숙진탁의 나라인 曹의 역사도 별도의 <세가> 없이 이 <관채세가> 끝에 기록되어 숙진탁부터 조백 양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陳杞世家>
순 임금의 후손인 호공이 분봉을 받은 진나라와 우 임금의 후손인 동루공이 분봉을 받은 기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의 경우는 호공 때부터 민공, 기나라의 경우는 동루공부터 간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衛康叔世家>
주문왕의 아들 위강숙이 분봉받은 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위강숙 때부터 군 각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宋微子世家>
은나라 주왕의 형 미자계가 분봉을 받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미자계가 자손이 없어 그의 아우 미중연 때부터 강왕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晉世家>
무왕의 아들 당숙우가 분봉받은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당숙우 때부터 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楚世家>
축융의 자손이라는 웅역이 분봉받은 초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웅역 때부터 부추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越王句踐世家>
하나라 소강의 서자 무여가 분봉받은 월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무여 때부터 무강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鄭世家>
주선왕의 이복동생 정환공이 분봉받은 정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환공 때부터 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趙世家>
비염의 차남의 후예인 열후가 분봉받은 나라로 숙대 때부터 왕 천, 대왕 가 형제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는 유력한 세 가문이 晉나라를 삼등분하면서 탄생한 나라였다.
<魏世家>
필나라의 후예였던 필만의 후예 문후가 분봉을 받은 나라로 필만 때부터 왕 가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韓世家>
晉나라의 방계 후손인 경후가 분봉받은 나라로 경후 때부터 왕 안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田敬仲完世家>
강태공이 분봉을 받은 강제의 마지막 군주였던 강공을 폐위한 태공 전화 이후의 제나라, 일명 전제의 기록으로 진경중완 때부터 마지막 왕 건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죽서기년》과 비교하면 중간에 누락된 군주가 한 명있다.
<孔子世家>
말 그대로 공자의 일대기이다. 제후가 아닌 공자를 <세가>에 기록함으로서 사마천의 공자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陳渉世家>
진 2세황제 때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의 일대기이다. 정식 왕조로 인정받지 못하고 반란군의 수괴로 끝난 진승을 <세가>에 기록하여 사마천이 진승의 난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外戚世家>
여기서의 '외척'은 한나라의 외척들을 의미한다. 한고조부터 한무제까지의 한나라 역대 황후와 황후의 친척들에 대한 기록이다.
<楚元王世家>
한고조 유방의 아우인 초원왕 유교와 그 후손의 전기이다. 유교는 《사기》에 '고조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라고 적혀 있으나, 《한서》에는 유방의 이복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소손이 마무리했으나 그 부분은 《한서》와 달라 잘못 보충된 것으로 여긴다.
<荊燕世家>
유방의 친척인 형왕 유가, 연왕 유택과 그 후손의 전기이다. 유가는 유방의 사촌형이지만 《사기》에는 어느 유파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齊悼惠王世家>
유방의 서장자 제도혜왕 劉肥와 그 후손들의 전기이다.
<蕭相國世家>
소하와 그 후손에 대한 전기.
<曹相國世家>
조참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留侯世家>
장량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陳丞相世家>
진평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絳侯周勃世家>
주발과 그 후손에 대한 전기. 다른 고제의 공신들과는 달리 주발의 둘째아들 주아부의 비중도 만만찮게 높다.
<梁孝王世家>
한문제의 아들인 양효왕 유무와 그 형제들 및 후손의 전기.
<五宗世家>
한경제의 아들들 중 제후국 왕에 봉해진 이들의 전기. 제목이 五宗인 것은 이 <세가>에 등장하는 한경제의 아들들이 각각 다섯 어머니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경제의 다섯 부인은 율희·정희·가부인·당희·왕부인 아후였다.
<三王世家>
한무제의 아들들 중 제후국 왕에 봉해진 이들에 대한 전기이긴 한데, 사실 이 <세가>는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의 황제의 교지, 공문이나 상소, 책봉문 등을 그대로 옮겨 붙여 놓았다.
5.5. <列傳>
천하에 공명을 떨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족이 아닌 타민족의 역사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문학의 산문 갈래인 전 문학의 시초이기도 하다. 후대의 實傳, 假傳, 託傳 등은 물론, 傳冊이라 불리던 조선 후기, 인물 중심의 소설 (한글 소설 포함) 등도 계보를 따져보면 사마천의 <열전>이 원조라는 이야기이다.
<백이열전>(伯夷列傳)
주문왕의 상나라 정벌을 반대하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고죽국의 왕자들인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실제 중심이 되는 부분은 백이와 숙제가 화를 입고 악인이 복락을 누리는 세태를 통해 천도의 정당성 여부를 논한 뒤, 기록을 통해 후세에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런 고로 <열전>의 서문 같은 성격이 짙다.
<관안열전>(管晏列傳)
춘추시대 제환공의 재상 관중과, 제경공의 재상 안영의 일대기.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도가의 노자와 장자, 형명학의 신불해, 법가의 한비자를 다룬 열전. 그래서 <노장신한열전>이라고도 한다.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춘추시대 제경공때의 장군 사마양저의 일대기.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춘추시대《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와 그의 후손인 전국시대의 손빈, 그리고 오기를 다룬 열전.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춘추시대 오자서를 다룬 열전. 그러나 후반에 초평왕의 손자인 白公 熊勝에 대한 기록도 있다.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공자 제자들의 열전. 안회, 자로, 자공 등등에 대한 기록이다. 이름이 언급된 제자는 총 72명이다.
<상군열전>(商君列傳)
전국시대 상앙의 일대기.
<소진열전>(蘇秦列傳)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의 일대기.
<장의열전>(張儀列傳)
전국시대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의 일대기. 소진 다음에 장의가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열전>의 순서도 이를 반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진나라의 첫 번째 승상이었던 저리질과 감무, 감무의 손자 감라를 다룬 열전.
<양후열전>(穰侯列傳)
진소왕의 모후인 宣太后의 남동생 양후 魏冉의 일대기.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명장들이었던 백기와 왕전의 일대기.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유가의 맹자와 순자를 비롯하여 음양가의 추연, 명가의 순우곤, 신도, 환연, 접자, 전병, 추석, 공손룡, 묵가의 묵자 등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일대기.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전국시대 전제의 맹상군 전문의 일대기. 그의 식객 풍환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전국시대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과 유세객 우경의 일대기.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전국시대 위나라의 신릉군 위무기의 일대기. 한고조 유방이 그를 존경해서인지 '위공자'로 따로 높여 부른 것으로 보인다.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전국시대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의 일대기.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진나라의 재상 범수와 그의 유세객 채택의 일대기.
<악의열전>(樂毅列傳)
악의를 비롯하여 그의 조상 악양과 악의의 아들 악간, 악승 등 악씨 가문의 열전.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염파와 인상여를 중심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전국시대 후기에 활약했던 조사, 이목 등 조나라 명장들의 열전.
<전단열전>(田單列傳)
전국시대 말기 화우지진으로 연나라군을 무찌른 전제의 명장 전단의 열전.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전국시대의 유세객 노중련과 추양의 열전.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초나라의 충신 굴원과 효문제 시기의 젊은 박사 가의의 이야기.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전국시대 말기 일개 조나라의 볼모였던 자초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든 거상 여불위의 일대기.
<자객열전>(刺客列傳)
여기 등장하는 자객은 모두 다섯 명으로 조말, 전저, 예양, 섭정, 형가이다.
<이사열전>(李斯列傳)
진시황의 승상이었던 이사의 일대기. 이사를 중심으로 진 제국의 흥망성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몽염열전>(蒙恬列傳)
진나라의 장수 몽염을 비롯하며 할아버지 몽오, 아버지 몽무, 동생 몽의까지 기록되어 있다.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두 사람의 행적이 겹쳐서인지 따로 전을 나누지 않고, 한꺼번에 하나의 전으로 뭉쳐서 서술한다.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경포열전>(鯨布列傳)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한삼걸 중 한 사람으로 《초한지》의 주역인 한신의 열전. 젊은 한신의 굴욕과 토사구팽까지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이 <열전>의 한신은 '한왕 신'이다.
<전담열전>(田儋列傳)
초한쟁패기 제나라에서 일어난 전씨 일족 관련 기록이다. 전담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과의 전투에서 빨리 전사한 관계로 전영과 전횡을 다룬 부분이 더 많다.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한나라 초기의 재상 장창(張蒼)이 주인공이지만, 장창의 어사대부 승진 직후에 전임 어사대부 주창, 조요, 임오, 조줄(조참의 아들)의 기록이 삽입되고,장창의 은퇴 후에는 후임 승상인 신도가의 일대기로 마무리된다. 저소손이 《사기》 집필 이후의 승상들인 차천추, 위현, 위상, 병길, 황패, 위현성, 광형의 일대기를 덧붙였다.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한고조 유방의 장수였던 부관, 근흡, 괴성후 주설의 전기.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한문제의 법관 장석지와, 문제에게 '명장을 거느릴 능력이 없다.'라고 직언한 풍당의 열전.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한문제 및 한경제 때의 고관으로 본인과 네 아들이 모두 2,000석의 녹봉을 받아 '만석군'이라 불린 石奮과, 한경제 시절 고관을 지낸 위관, 직불의, 주문, 장숙의 열전.
<전숙열전>(田叔列傳)
한문제 및 한경제 때의 관료 전숙과 그 아들 전인, 한무제때의 관료이자 사마천의 절친이었던 임안의 열전.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춘추시대 때의 명의로 편작이라 불렸던 진월인과, 한문제 시기의 명의인 창공 순우의의 전기.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오왕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의 아들로 오초7국의 난의 주동자였다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한문제의 황후인 두황후의 사촌 위기후 두영과 한경제 황후의 동모동생인 무안후 전분의 전기.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한무제 때의 관료인 한안국의 전기로 한안국의 자가 '장유'였다.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명궁으로 유명한 이광의 열전. 그 유명한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이 없으나, 그 밑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흉노열전>(匈奴列傳)
흉노가 주역이긴 하지만 중항열의 행적도 여기에 전한다. 사마천이 직접 썼는지에 의문이 드는 내용들이 있다. 《사기》의 마지막 사건인 흉노의 연연산 전투가 수록되어 있다.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한무제 때 대흉노 전쟁의 명장이었던 위청과 곽거병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들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들의 약전도 실려 있다.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한무제 때의 재상인 공손홍과 유학자인 주보언의 전기.
<남월열전>(南越列傳)
진나라의 관리였던 조타가 세운 남월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이다. 이 <열전>의 찬론은 사마천이 아니라 후세가 위작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동월열전>(東越列傳)
옛 월나라 땅에 세워진 민월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
<조선열전>(朝鮮列傳)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당연히 고조선으로 특히 '위만조선'을 지칭한다.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이른바 '촉' 지역 남부 및 남만 방면 이민족에 대한 정벌기의 성격이 강하다.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한무제 때의 유명한 문인인 사마상여의 열전.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한고조의 서자인 회남여왕 유장과 유장의 장남 회남왕 유안, 3남 형산왕 유사의 전기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황족처럼 보여 이들을 <열전>에 올릴 까닭이 있나 싶지만, 세 사람 모두 각기 다른 역모 사건으로 주살되었다.
<순리열전>(循吏列傳)
덕망 있는 관리에 대한 열전으로 <혹리열전>과 대조를 이룬다.
<급정열전>(汲鄭列傳)
한무제 때의 현명한 신하들인 급암, 정당시의 열전.
<유림열전>(儒林列傳)
전한시대의 유학자들에 대한 열전. 오경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유생들을 다룬다.
<혹리열전>(酷吏列傳)
가혹한 관리들의 열전으로 <순리열전>과 대조를 이룬다.
<대완열전>(大苑列傳)
한무제때 장건의 서역 원정으로부터 시작된 실크로드 개척과 대완국 토벌에 대해 기술했다. 전한시대 어느 순간에 사라졌다가 《한서》 편찬 직전에 누군가가 《사기》의 다른 내용을 짜깁기해서 복원했다는 의혹이 있다.
<유협열전>(遊俠列傳)
유협은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 좀 순화해도(?) 건달패들인데, 단순한 폭력배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나름대로 의리와 품격이 있다고 당대에 인정받은 주가, 전중, 극맹, 곽해 등 이른바 협객이라 평가받을 만한 이들의 일화를 기술하고 있다.
<영행열전>(佞幸列傳)
황제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누린 사람들의 열전.
<골계열전>(滑稽列傳)
유머를 이용해 군주에게 직언한 사람들의 열전. 순우곤과 동방삭이 여기 실려 있다.
<일자열전>(日者列傳)
아래 <귀책열전> 항목 참조.
<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과 <귀책열전> 모두 점치는 사람들에 대한 <열전>인데, 일자는 태양을 관찰하여 점을 치는 사람이고, 귀책은 거북점을 말한다. 망실된 것을 저소손이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일자열전>에는 사마계주라는 사람의 행적이 쓰여 있다. <귀책열전>에는 인물의 행적이 없어 인물의 행적을 담는 <열전>으로서는 특이하며, 정치 비판적인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도 특이한 점이다. 다만, 사마천의 원본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는 내용은 저소손이 다시 쓴 것이다.
<화식열전>(貨殖列傳)
돈을 벌어 크게 성공한 이들의 성공 스토리. 월나라 재상 범려가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치이자피', '도주공' 등으로 불리며 갑부가 된 일화가 바로 여기에서 소개된다. 중국 각지의 경제나 특산물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화식열전>을 따로 쓴 것은, 돈이 없어 궁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마천의 개인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의 집안 내력과 《사기》를 쓸 때까지의 삶을 담고 있다. 《사기》의 맨 마지막 편이지만, 《사기》 각 편의 서술 의도 역시 담고 있어 사실은 《사기》 전체의 머리말이자 해제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사기》의 끝이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편이다. 참고로 항목 맨 위에 있는 사마천의 말은 바로 <태사공자서> 맨 마지막에 있는 말로, 《사기》 전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6. 관련 고사성어
가급인족(家給人足)-상군열전
가도벽립(家徒壁立)-사마상여열전
계구우후(鷄口牛後)-소진열전
걸식표모(乞食漂母)
계명구도(鷄鳴狗盜)
계포일낙(季布一諾)
곡학아세(曲學阿世)
과하지욕(袴下之辱)
교주고슬(膠柱鼓瑟)
국사무쌍(國士無雙)
굴묘편시(掘墓鞭尸)
금의야행(錦衣夜行)
기화가거(奇貨可居)-상군열전
낭중지추(囊中之錐)
누란지위(累卵之危)
다다익선(多多益善)
도행역시(倒行逆施)
맥수지탄(麥秀之嘆)
명적
모수자천(毛遂自薦)
문경지교(刎頸之交)
방약무인(傍若無人)
배수진(背水陣)
부형청죄(負荊請罪)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목지신(徙木之信)
사회부연(死灰復燃)
상가지구(喪家之狗)
석고대죄(席藁待罪)
수서양단(首鼠兩端)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와신상담(臥薪嘗膽)
완벽귀조(完璧歸趙)
원교근공(遠交近攻)
위위구조(圍魏救趙)
일모도원(日暮途遠)
일반천금(一飯千金)
일패도지(一敗塗地)
주지육림(酒池肉林)- 殷本紀
지록위마(指鹿爲馬)
천려일득(千慮一得)
천려일실(千慮一失)
척구폐요(跖狗吠堯)
토사구팽(兎死狗烹)
표모반신(漂母飯信)
호복기사(胡服騎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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