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一回
祭瀘水漢相班師 伐中原武侯上表.
제91회
祭瀘水하여 漢相은 班師하고, 伐中原하려 武侯가 上表하다.
卻說
孔明班師回國,孟獲率引大小洞主酋長,及諸部落羅拜相送;
각설하고
공명이 回國하려 班師하자, 맹획은 대소의 동주, 추장, 여러 부락을 率引하고 늘어서서 절하며 환송하였다.
前軍至瀘水,時值九月秋天,忽然陰雲布合,狂風驟起;
앞 부대가 노수에 이르렀을 때는 구월 가을이었다. 홀연히 陰雲(먹구름)이 布合(긴밀히 분포함)하고, 광풍이 驟起하였다.
兵不能渡,回報孔明。
군사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공명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孔明遂問孟獲,獲曰:
「此水原有猖神作禍,往來者必須祭之.」
공명이 맹획에게 물으니 맹획이 말하였다.
“이 물에는 원래 猖神이 있어서 재앙을 일으키니 往來者는 반드시 제사를 지냅니다.”
孔明曰:
「用何物祭享?」
공명이 말하였다.
“어떤 물건으로 祭享하오?”
獲曰:
「舊時國中因猖神作禍,用七七四十九顆人頭并黑牛白羊祭之,自然風恬浪靜,更兼連年豐稔.」
맹획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나라 안에 창신이 재앙을 일으킬 때, 49顆의 人頭와 黑牛白羊으로써 제사하면, 자연히 風恬浪靜하고 게다가 連年豐稔합니다.”
孔明曰:
「吾今事已平定,安可妄殺一人?」
공명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일을 이미 평정하였는데, 어찌 함부로 한 사람이라도 죽이겠소?”
遂自到瀘水岸邊觀看。
하고는 스스로 瀘水岸邊에 이르러 觀看하였다.
果見陰風大起,波濤洶湧,人馬皆驚。
과연 보니 陰風大起하고 波濤洶湧하니 人馬가 모두 놀랐다.
孔明甚疑,即尋土人問之。
공명이 매우 괴이하게 여겨 토인을 찾아 물었다.
土人告說:
「自丞相經過之後,夜夜只聞得水邊鬼哭神號。
自黃昏直至天曉,哭聲不絕。
瘴煙之內,陰鬼無數。
因此作禍,無人敢渡.」
토인이 고하여 말하였다.
“승상께서 지나간 후부터, 밤마다 물가에서 鬼哭神號함이 들립니다.
날이 昏直부터 天曉까지 哭聲不絕입니다.
瘴煙之內에 陰鬼無數입니다.
이들이 재앙을 짓기 때문에, 無人敢渡입니다.”
孔明曰:
「此乃我之罪愆也。
前者馬岱引蜀兵千餘,皆死於水中;更兼殺死南人,盡棄此處:
狂魂怨鬼,不能解釋,以致如此。
吾今晚當親自往祭.」
공명이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나의 罪愆이다.
앞서 마대가 蜀兵 천여 명을 인솔하였는데 모두 물속에서 죽었고, 게다가 죽인 南人들을 모두 여기에 버렸다.
원통한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여 이같이 되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직접 가서 제사해야겠다.”
土人曰:
「須依舊例,殺四十九顆人頭為祭,則怨鬼自散也.」
토인이 말하였다.
“모름지기 舊例를 따라, 죽은 49顆의 人頭로 제사하면, 怨鬼들이 저절로 흩어질 터입니다.”
孔明曰:
「本為人死而成怨鬼,豈可又殺生人耶?
吾自有主意.」
喚行廚宰殺牛馬,和麵為劑,塑成人頭,內以牛羊等肉代之,名曰「饅頭」。
공명이 말하였다.
“본래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원귀가 되었는데 어찌 또 산 사람을 죽이겠는가?
나에게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
廚宰를 불러 소와 말을 잡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人頭를 塑成하고, 안에는 소와 양 등의 고기로써 대신하고 ‘饅頭’라 이름하라.”
當夜於瀘水岸上,設香案,鋪祭物,列燈四十九盞,揚幡招魂;將饅頭等物,陳設於地。
그날 밤 瀘水岸上에서 設香案,鋪祭物하고 등잔 49종지를 나열하고, 깃발을 흔들어 招魂하였다. 饅頭 등의 제물을 가져다 땅에 진설하였다.
三更時分,孔明金冠鶴氅,親自臨祭,令董厥讀祭文。
3更에 공명은 金冠을 쓰고 鶴氅衣를 입고 직접 제사에 임하여 董厥에게 제문을 읽게 하였다.
其文曰:
그 제문은 이러하다.
<維大漢建興三年秋九月一日,武鄉侯領益州牧丞相諸葛亮,謹陳祭儀,享於故歿王事蜀中將校及南人亡者陰魂曰:
我大漢皇帝,威勝五霸,明繼三王。
昨自遠方侵境,異俗起兵;縱蠆尾以興妖,恣狼心而逞亂。
我奉王命,問罪遐荒;大舉貔貅,悉除螻蟻;雄軍雲集,狂寇冰消。
纔聞破竹之聲,便是失猿之勢。
但士卒兒郎,盡是九州豪傑;官僚將校,皆為四海英雄。
習武從戎,投明事主,莫不同申三令,共展七擒;齊堅奉國之誠,並效忠君之志。
何期汝等偶失兵機,緣落奸計:
或為流矢所中,魂掩泉臺;或為刀劍所傷,魄歸長夜。
生則有勇,死則成名。
今凱歌欲還,獻俘將及。
汝等英靈尚在,祈禱必聞。
隨我旌旗,逐我部曲,同回上國,各認本鄉,受骨肉之蒸嘗,領家人之祭祀;莫作他鄉之鬼,徒為異域之魂。
我當奏之天子,使汝等各家盡霑恩露:
年給衣糧,月賜廩祿。
用茲酬答,以慰汝心。
至於本境土神,南方亡鬼,血食有常,憑依不遠。
生者既凜天威,死者亦歸王化。
想宜寧帖,毋致號啕。
聊表丹忱,敬陳祭祀。
嗚呼,哀哉!伏惟尚饗!>
<大漢 建興 3년 가을 9월 초하루에 武鄉侯 領益州牧 丞相 諸葛亮은 삼가 제사 의식을 베풀고 王事로 죽은 蜀中將校와 南人亡者의 陰魂에게 祭享합니다.
“우리 大漢皇帝는 위엄이 5패보다 낫고 현명함이 3왕을 계승하였습니다.
지난날 遠方侵境하고 異俗起兵하였습니다. 전갈의 꼬리를 함부로 놀려 興妖하고, 이리의 마음을 방자하게 하여 逞亂하였습니다.
우리가 王命을 받들어 멀리 변경에 죄를 묻고자 하였습니다. 크게 용맹한 군사를 일으켜 땅강아지와 개미 같은 미미한 작은 힘들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雄軍雲集하니 狂寇冰消하였습니다.
잠깐 破竹之聲이 들리자 곧 원숭이들이 도망가는 형세이었습니다.
士卒兒郎은 모두 九州豪傑이고, 官僚將校는 모두 四海英雄입니다.
무예를 익혀 정벌을 따르고, 名主에게 몸을 던져 섬기며, 告戒를 따르지 않음이 없어, 함께 일곱 번을 사로잡는 일을 펼쳤습니다. 모두 奉國之誠을 굳게 하였고, 아울러 忠君之志를 본받았습니다.
어찌 그대들이 우연히 군사의 전략을 잃고 간사한 계책에 떨어질 것을 기약하였겠습니까?
혹 流矢에 적중되어 魂이 泉臺에 묻히게 되고, 혹은 刀劍에 상처를 입어 魄이 長夜(죽음)로 돌아갔습니다.
살아서는 용맹이 있었고, 죽어서는 명예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승리하고 돌아가 장차 이르러 포로를 바치려 합니다.
그대들 영령이 아직 존재해 있으니 기도를 반드시 들을 것입니다.
우리 깃발을 따르고 우리 部曲을 따라, 함께 上國으로 돌아가, 각각 고향을 찾고 骨肉之蒸嘗을 받고, 가족의 제사를 받으십시오. 他鄉之鬼가 되거나 헛되이 異域之魂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마땅히 천자에게 아뢰어 그대들 각각의 집이 恩惠을 입게 하고, 해마다 옷과 식량을 내리며 달마다 녹봉을 내릴 것입니다. 이러한 보답으로써 그대들의 마음을 위로합니다.
本境土神과 南方亡鬼에 이르기까지 血食(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이 항상 있을 터이니 의지할 곳이 멀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이미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죽은 자도 또한 왕의 교화에 귀의하였습니다.
생각하건데 마땅히 편안하게 여기시어 큰 소리 내어 울지 마십시오.
애오라지 간절한 정성을 표시하여 공경히 제물을 차리고 제사합니다.
아! 슬프다! 삼가 바라건대 흠향하십시오!>
讀畢祭文,孔明放聲大哭,極其痛切,情動三軍,無不下淚。
제문을 읽고 나서 공명이 放聲大哭하여 極其痛切하니, 정성이 3군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孟獲等眾,盡皆哭泣。
맹획 등의 무리가 모두 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只見愁雲怨霧之中,隱隱有數千鬼魂,皆隨風而散。
愁雲怨霧之中에 은은히 있던 數千鬼魂이 모두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於是孔明令左右將祭物盡棄於瀘水之中。
이에 공명은 좌우에게 명령하여 제물을 모두 瀘水之中에 버리게 하였다.
次日,孔明引大軍俱到瀘水南岸,但見雲收霧散,風靜浪平。
다음 날 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모두 瀘水南岸에 이르렀는데 雲收霧散하고 風靜浪平하였다.
蜀兵安然盡渡瀘水。
蜀兵이 편안히 모두 노수를 건넜다.
果然鞭敲金鐙響,人唱凱歌還。
과연 ‘채찍으로 금등을 두드려 울리고, 사람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간다.’라는 것이었다.
行到永昌,孔明留王伉、呂凱守四郡;
행렬이 영창에 이르자 공명은 왕항과 여개를 남겨 4군을 지키게 하였다.
發付孟獲領眾自回,囑其勤政馭下,善撫居民,勿失農務。
孟獲涕泣拜別而去。
맹획에게 무리를 거느리고 돌아가도록 조치하면서 부탁하기를,
‘정사에 힘쓰면서 아랫사람을 부리고 백성을 잘 어루만지고 농사의 때를 잃지 말라.’
라고 하였다.
맹획이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갔다.
孔明自引大軍回成都。
공명이 대군을 이끌고 성도에 돌아왔다.
後主排鑾駕出郭三十里迎接,下輦立於道傍,以候孔明。
후주가 鑾駕를 타고 성곽 밖에 30리를 나와 영접하는데, 下輦立於道傍하여 공명을 기다렸다.
孔明慌下車伏道而言曰:
「臣不能速平南方,使主上懷憂,臣之罪也.」
공명이 황급히 수레에서 내려 길에 엎드려 말하였다.
“신이 빨리 南方을 평정하지 못하여 주상께서 근심을 갖게 하였으니 신의 죄입니다.”
後主扶起孔明,並車而回,設太平筵會,重賞三軍。
후주가 공명을 부축하여 일으키고, 수레를 나란히 하여 돌아가 태평연회를 베풀고, 3군에 많은 상을 주었다.
自此遠邦進貢來朝者三百餘處。
이로부터 遠邦進貢來朝者가 3백여 곳이었다.
孔明奏准後主,將歿於王事者之家,一一優恤。
공명이 후주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고, 王事로 죽은 자의 집에 일일이 넉넉히 구제하였다.
人心歡悅,朝野清平。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조정과 재야가 맑고 편안해졌다.
卻說
魏主曹丕在位七年,即蜀漢建興四年也。
각설하고
魏主 조비의 재위 7년은 곧 촉한 건흥 4년이다.
丕先納夫人甄氏,即袁紹次子袁熙之婦,前破鄴城時所得。
조비는 먼저 부인 견씨를 맞아들였으니 원소의 둘째 아들 원희의 부인이었는데 앞서 업성을 깨뜨렸을 때 얻었다.
後生一子,名叡,字元仲,自幼聰明,丕甚愛之。
후에 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叡이고 자는 元仲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後丕又納安平廣宗人郭永之女為貴妃,甚有顏色。
후에 조비는 또 安平 廣宗人 郭永之女를 받아들여 귀비로 삼았는데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其父嘗曰:
「吾女乃女中之王也.」
故號為「女王」。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말하였다.
“내 딸은 곧 여자 중의 왕이다.”
그래서 ‘女王’이라 불렀다.
自丕納為貴妃,因甄夫人失寵,郭貴妃欲謀為后,卻與幸臣張韜商議。
조비가 맞아들여 귀비가 되고부터, 견부인이 총애를 잃었기 때문에, 곽귀비는 황후가 되기를 도모하여 幸臣 張韜와 商議하였다.
時丕有疾,韜乃詐稱於甄夫人宮中掘得桐木偶人,上書天子年月日時,為魘鎮之事。
그때 조비는 병이 있었다. 장도는 견부인의 궁 안에서 땅을 파서 桐木偶人를 얻었는데, 그 위에 천자의 연월일시를 씀은 저주하는 일이라고 詐稱하였다.
丕大怒,遂將甄夫人賜死,立郭貴妃為后。
조비가 크게 노하여 견부인을 賜死하고 立郭貴妃為后하였다.
因無出,養曹叡為己子;
(곽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조예를 기르기를 자기의 아들처럼 여겼다.
雖甚愛之,不立為嗣。
비록 그를 매우 사랑하였으나, 세워서 후사로 삼지는 않았다.
叡年至十五歲,弓馬熟嫺。
조예가 나이 15세에 이르자 弓馬에 熟嫺하였다.
當年春二月,丕帶叡出獵。
그해 봄 이월에 조비는 조예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行於山塢之間,趕出子母二鹿,丕一箭射倒母鹿,回觀小鹿馳於曹叡馬前。
山塢之間(산 중앙이 오목한 사이)에 가서, 새끼와 어미 사슴 두 마리를 쫓아나가다가, 조비가 화살을 쏘아 어미 사슴을 쓰러뜨리고, 小鹿을 돌아보니 소록이 조예의 말 앞으로 달려갔다.
丕大呼曰:
「吾兒何不射之?」
조비가 크게 소리쳐 말하였다.
“내 아들은 어찌하여 활을 쏘지 않느냐?”
叡在馬上泣告曰:
「陛下已殺其母,安忍復殺其子?」
조예가 말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하였다.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이셨는데 어찌 차마 또 그 새끼를 죽이겠습니까?”
丕聞之,擲弓於地曰:
「吾兒真仁德之主也!」
조비가 그 말을 듣고 활을 땅에 던져버리고 말하였다.
“내 아들이 참으로 仁德之主이구나!”
於是封叡為平原王。
이에 조예를 봉하여 平原王으로 삼았다.
夏五月,丕感寒疾,醫治不痊,乃召中軍大將軍曹真、鎮軍大將軍陳群、撫軍大將軍司馬懿三人入寢宮。
여름 5월에 조비가 寒疾에 걸렸는데, 의원이 치료하여도 낫지 않으니, 이에 中軍大將軍 曹真, 鎮軍大將軍 陳群, 撫軍大將軍 司馬懿 세 사람을 寢宮에 불렀다.
丕喚曹叡至,指謂曹真等曰:
「今朕病已沈重,不能復生。
此子年幼,卿等三人,可善輔之,勿負朕心.」
조비가 조예를 불러서 오게 하고, 그를 가리키며 조진 등에게 일렀다.
“지금 짐의 병이 이미 沈重하니 다시 살 수 없을 터이오.
이 아이는 나이가 어리니, 경 등 세 사람은 잘 보필하여 짐의 마음을 저버리지 마시오.”
三人皆告曰:
「陛下何出此言?
臣等願竭力以事陛下,至千秋萬歲.」
세 사람이 모두 고하였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들은 원하건대 힘을 다하여 폐하를 섬겨, 千秋萬歲에 이르겠습니다.”
丕曰:
「今年許昌城門無故自崩,乃不祥之兆,朕故自知必死也.」
조비가 말하였다.
“올해 허창의 성문이 無故自崩하니 不祥之兆이라, 짐은 틀림없이 죽으리라 스스로 알았소.”
正言間,內侍奏征東大將軍曹休入宮問安。
말하는 사이에 내시가 아뢰기를, 征東大將軍 曹休가 入宮問安한다고 아뢰었다.
丕召入謂曰:
「卿等皆國家柱石之臣也。
若能同心輔朕之子,朕死亦瞑目矣!」
조비가 불러들여 일렀다.
“경들은 모두 國家柱石之臣이오.
만약 마음을 같이하여 짐의 아들을 보필하면 짐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소!”
言訖,墮淚而薨。
말을 마치자 눈물을 떨어뜨리며 薨하였다.
時年四十歲,在位七年。
그때 나이는 40세로 在位七年이었다.
於是曹真、陳群、司馬懿、曹休等,一面舉哀,一面擁立曹叡為大魏皇帝。
이에 조진, 진군, 사마의, 조휴 등은 한편으로는 舉哀하고, 한편으로는 조예를 大魏皇帝로 擁立하였다.
諡父丕為文皇帝,諡母甄氏為文昭皇后。
아버지 조비를 文皇帝라 諡하고, 어머니 견씨는 文昭皇后라 諡하였다.
封鍾繇為太傅,曹真為大將軍,曹休為大司馬,華歆為太尉,王朗為司徒,陳群為司空,司馬懿為驃騎大將軍。
종요를 태부에 봉하고, 조진을 대장군, 조휴를 대사마, 화흠을 태위, 왕랑을 사도, 진군을 사고, 사마의를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其餘文武官僚,各各封贈。
그 나머지 文武官僚를 각각 封贈하였다.
大赦天下。
천하에 크게 사면하게 하였다.
時雍、涼二州缺人守把,司馬懿上表乞守西涼等處。
그때 옹주, 양주 2주는 缺人守把하니, 사마의가 표를 올려 西涼等處를 지키고자 청하였다.
曹叡從之,遂封懿提督雍、涼等處兵馬。
조예가 그 말을 좇아 사마의를 봉하여 옹주, 양주 등의 兵馬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領詔去訖。
명을 받고 갔다.
早有細作飛報入川。
어느새 세작의 급보가 入川하였다.
孔明大驚曰:
「曹丕已死,孺子曹叡即位,餘皆不足慮,司馬懿深有謀略,今督雍、涼兵馬,倘訓練成時,必為蜀中之大患。
不如先起兵伐之.」
공명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조비가 죽고 어린 아들 조예가 즉위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근심할 것이 없다. 사마의는 깊이 모략을 갖추었는데 지금 옹주와 양주의 병마를 감독하니, 만약 훈련이 성숙하면 필시 蜀中之大患이 될 터이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정벌함이 낫겠다.”
參軍馬謖曰:
「今丞相平南方回,軍馬疲敝,只宜存恤,豈可復遠征?
某有一計,使司馬懿自死於曹叡之手,未知丞相鈞意允否?」
참군 馬謖이 말하였다.
“지금 승상께서 平南方回하여 軍馬疲敝하니 마땅히 存恤해야 하는데 어찌 다시 遠征하겠습니까?
저에게 한 계책이 있어 사마의가 스스로 조예의 손에 죽게 하겠는데, 승상께서 윤허하시겠습니까?”
孔明問:
「是何計?」
공명이 물었다.
“무슨 계책인가?”
馬謖曰:
「司馬懿雖是魏國大臣,曹叡素懷疑忌,何不密遣人往洛陽鄴郡等處,布散流言,道此人欲反?
更作司馬懿告示天下榜文,遍貼諸處,使曹叡心疑,必然殺此人也.」
마속이 말하였다.
“사마의가 비록 魏國大臣이나, 조예가 평소에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어찌 비밀리에 사람을 낙양과 업군 등지에 보내 布散流言하기를, 이 사람이 반역하려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더하여 사마의가 천하에 告示하는 榜文을 지어 각처에 널리 붙여서, 조예가 마음속으로 의심하게 하면 틀림없이 이 사람을 죽일 터입니다.”
孔明從之,即遣人密行此計去了。
공명이 그 말을 따라 곧 사람을 골라 이 계책을 비밀리에 실행하러 가게 하였다.
卻說
鄴城門上,忽一日見貼下告示一道。
각설하고
鄴郡의 城門 위에 하루는 고시 한 통이 붙어 있음이 보였다.
守門者揭了,來奏曹叡。
문지기가 떼어 조예에게 와서 아뢰었다.
叡觀之,其文曰:
조예가 보니 그 글에 말하였다.
<驃騎大將軍總領雍、涼等處兵馬事司馬懿,謹以信義布告天下:
昔太祖武皇帝,創立基業,本欲立陳思王子建為社稷主;
不幸奸讒交集,歲久潛龍。
皇孫曹叡,素無德行,妄自居尊,有負太祖之遺意。
今吾應天順人,剋日興師,以慰萬民之望。
告示到日,各宜歸命新君。
如不順者,當滅九族!
先此告聞,想宜知悉。>
<표기대장군으로 옹주, 양주 등지의 병마 일을 總領하는 사마의는 삼가 信義로 布告天下한다.
옛날 태조 무황제께서 創立基業하고 본래 陳思王 子建을 社稷主로 세우고자 하셨다.
불행히도 간사하고 참소하는 이들이 모여서 오래도록 잠룡으로 지내 왔다.
皇孫 조예는 평소 덕행이 없으면서도 망령되이 스스로 높은 자리에 머물러 태조가 남긴 뜻을 저버렸다.
지금 나는 應天順人하여 剋日興師함으로써 萬民之望을 위로하고자 한다.
告示가 이르는 날, 각자는 마땅히 새로운 임금에게 歸命하라.
不順者는 마땅히 구족을 滅할 터이다!
먼저 이렇게 알리니, 마땅히 빠짐없이 알기를 바란다.>
曹叡覽畢,大驚失色,急問群臣。
조예는 읽고 나서 大驚失色하여 급히 신하들에게 물었다.
太尉華歆奏曰:
「司馬懿上表乞守雍、涼,正為此也。
先時太祖武皇帝嘗謂臣曰:
『司馬懿鷹視狼顧,不可付以兵權;久必為國家大禍。』
今日反情已萌,可速誅之.」
태위 화흠이 아뢰었다.
“사마의가 표를 올려 옹주와 양주를 지키겠다고 청함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太祖武皇帝께서 신에게 이르기를, ‘사마의는 鷹視狼顧하니 不可付以兵權이니, 오래되면 필시 국가의 큰 재앙이 되겠다.’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배반하는 정이 이미 싹텄으니 빨리 그를 죽여야 합니다.”
王朗奏曰:
「司馬懿深明韜略,善曉兵機,素有大志;若不早除,久必為禍.」
왕랑이 아뢰었다.
“사마의는 병법에 매우 밝고 군사의 기미를 잘 알아채며, 평소에 큰 뜻을 품었습니다.
일찍 제거하지 않고 오래되면 반드시 재앙이 될 터입니다.”
叡乃降旨,欲興兵御駕親征。
조예는 이에 명령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御駕親征하려 하였다.
忽班部中閃出大將軍曹真奏曰:
「不可。
文皇帝託孤於臣等數人,是知司馬仲達無異志也。
今事未知真假,遽爾加兵,乃逼之反耳。
或者蜀吳奸細行反間之計,使我君臣自亂,彼卻乘虛而擊,未可知也。
陛下幸察之.」
홀연히 班部中에서 재빨리 나오며 대장군 조진이 아뢰었다.
“안 됩니다.
문황제께서 託孤於臣等數人하심은 司馬仲達無異志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에 未知真假인데 대번에 군사를 일으키면, 그를 핍박하여 반역하게 할 뿐입니다.
혹 蜀吳奸細가 反間之計를 실행하여 我君臣自亂하게 하고, 그들이 빈틈을 타고 공격하려는 것일지도 未可知也입니다.
폐하께서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叡曰:
「司馬懿若果謀反,將奈何?」
조예가 말하였다.
“사마의가 만약 과연 모반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
真曰:
「如陛下心疑,可倣漢高偽遊雲夢之計。
御駕幸安邑,司馬懿必然來迎;觀其動靜,就車前擒之,可也.」
조진이 말하였다.
“만약 폐하께서 마음속에 의심하시면, 한나라 고조께서 偽遊雲夢之計를 모방하십시오.
御駕幸安邑하면 사마의가 틀림없이 영접할 터이니, 그 동정을 보고 수레 앞에 올 때 사로잡으면 됩니다.”
叡從之,遂命曹真監國,親自領御林軍十萬,徑到安邑。
조예가 그 말을 따라 조진에게 나라를 살피게 하고 직접 어림군 10만을 거느리고 안읍으로 곧장 갔다.
司馬懿不知其故,欲令天子知其威嚴,乃整兵馬,率甲士數萬來迎。
사마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천자에게 그 위엄을 보이고자 병마를 정돈하여 갑사 수만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近臣奏曰:
「司馬懿果率兵十餘萬,前來抗拒,實有反心矣.」
근신이 아뢰었다.
“사마의가 과연 군사 10여 만을 거느리고 와서 抗拒하니 진실로 反心이 있습니다.”
叡慌命曹休先領兵迎之。
조예가 황급히 조휴에게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맞이하게 하였다.
司馬懿見兵馬前來,只疑車駕親至,伏道而迎。
사마의는 병마가 앞에 옴을 보고 車駕가 직접 왔다고 추측하여 길에 엎드려 맞이하였다.
曹休出曰:
「仲達受先帝託孤之重,何故反耶?」
조휴가 나와 말하였다.
“중달은 先帝託孤之重을 받고서 무슨 이유로 반역하는가?”
懿大驚失色,汗流遍體,乃問其故。
사마의가 大驚失色하여 汗流遍體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休備言前事。
조휴가 前事를 모두 말하였다.
懿曰:
「此吳、蜀奸細反間之計,欲使我君臣自相殘害,彼卻乘虛而襲。
某當自見天子辨之.」
사마의가 말하였다.
“이것은 吳蜀奸細의 反間之計로 우리 군신이 스스로 해치게 하고, 빈틈을 타서 기습하려 함입니다. 제가 마땅히 스스로 천자를 뵙고 해명하겠습니다.”
遂即退了軍馬,至叡前俯伏泣奏曰:
「臣受先帝託孤之重,安敢有異心?
必是吳、蜀之奸計。
臣請提一旅之師,先破蜀,後伐吳,報先帝與陛下,以明臣心.」
즉시 군사를 물리고 조예 앞에 가서 俯伏泣奏하였다.
“신이 선제의 託孤之重을 받고 어찌 감히 異心을 가지게겠습니까?
필시 吳蜀之奸計입니다.
신이 청컨대 一旅之師를 거느리고 先破蜀하고, 後伐吳하여 선제와 폐하께 보답함으로써 신의 마음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叡疑慮未決。
조예는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하였다.
華歆奏曰:
「不可付之兵權。
可即罷歸田里.」
화흠이 아뢰었다.
“병권을 주어서는 안 되고, 곧 파직하여 田里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叡依言,將司馬懿削職回鄉,命曹休總督雍、涼軍馬。
조예가 그 말을 따라 사마의를 削職回鄉하고, 조휴에게 옹주와 양주의 병마를 總督하게 하였다.
曹叡駕回洛陽。
조예의 수레는 낙양으로 돌아갔다.
卻說
細作探知此事,報入川中。
각설하고
첩자가 이 일을 탐지하여 報入川中하였다.
孔明聞知大喜曰:
「吾欲伐魏久矣,奈有司馬懿總雍、涼之兵。
今既中計遭貶,吾有何憂?」
공명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위를 정벌하고자 한 지 오래되었으나,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군사를 총괄하고 있는데 어찌하겠는가?
지금 계책에 빠져 遭貶하였으니,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
次日,後主早朝,大會官僚。
다음 날 후주가 일찍 조회하고 크게 관료를 모았다.
孔明出班上出師表一道。
공명이 出班하여 出師表 한 통을 올렸다.
表曰:
표는 이러하였다.
<臣亮言: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今天下三分,益州罷敝。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遺德,恢宏志士之氣;不宜妄自菲薄,引喻失義,以塞忠諫之路也。
宮中府中,俱為一體;陟罰臧否,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為忠善者,宜付有司,論其刑賞,以昭陛下平明之治;不宜偏私,使內外異法也。
侍中侍郎郭攸之、費褘、董允等,此皆良實,志慮忠純,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
愚以為宮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然後施行,必得裨補闕漏,有所廣益。
將軍向寵,性行淑均,曉暢軍事,試用之於昔日,先帝稱之曰「能」,是以眾議舉寵以為督。
愚以為營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必能使行陣和穆,優劣得所也。
親賢臣,遠小人,此先漢所以興隆也;親小人,遠賢臣,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每與臣論此事,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侍中、尚書、長史、參軍,此悉貞亮死節之臣也。
願陛下親之,信之,則漢室之隆,可計日而待也。
臣本布衣,躬耕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馳驅。
後值傾覆,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謹慎,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夙夜憂慮,恐付託不效,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深入不毛。
今南方已定,甲兵已足,當獎帥三軍,北定中原,庶竭駑鈍,攘除姦凶,興復漢室,還於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進盡忠言,則攸之、褘、允之任也。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不效則治臣之罪,以告先帝之靈;若無興復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以彰其慢。
陛下亦宜自謀,以諮諏善道,察納雅言,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臨表涕泣,不知所云!>
<신 제갈량은 말씀드립니다.
선제께서 創業未半인데 中道崩殂하셨습니다. 지금 天下三分이나, 익주는 괴롭고 곤핍합니다. 지금은 진실로 危急存亡之秋입니다.
그러나 侍衛之臣은 不懈於內하고, 忠志之士는 忘身於外者입니다.
대개 先帝之殊遇를 追遠하여 폐하께 보답하고자 합니다.
진실로 開張聖聽하여 光先帝遺德하고 志士之氣을 넓혀야 합니다.
함부로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引喻失義하여 忠諫之路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宮中府中은 모두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陟罰臧否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作奸犯科와 為忠善者는 마땅히 有司에 부탁하여 論其刑賞하여 폐하의 平明之治를 밝혀야 합니다. 사사로움에 치우치거나 內外에 법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시중시랑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은 모두 良實하며 志慮忠純하여 선제께서 簡拔하여 폐하께 남기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宮中之事는 事無大小로 모두 그들에게 자문하여 시행하시면, 틀림없이 裨補闕漏하여 有所廣益일 것입니다.
장군 향총은 性行淑均하며 軍事에 밝게 통합니다. 지난날에 시험 삼아 쓰시고 선제께서 그를 칭찬하기를 ‘유능하다.’라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의논하여 향총을 천거하여 도독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營中之事는 事無大小로 모두 그에게 자문하시면, 틀림없이 군대를 화목하게 하고 優劣得所(유능한 자와 무능한자가 제 자리를 잡음)할 것입니다.
親賢臣하고 遠小人함, 이것이 先漢所以興隆이고, 親小人하고 遠賢臣함, 이것이 後漢所以傾頹입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 매번 신과 이 일을 논하시면서 일찍이 환제, 영제에 대하여 탄식하고 痛恨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侍中、尚書、長史、參軍 이들은 모두 곧고 밝으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신하들입니다.
원하건대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하시고,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漢室之隆은 計日而待할 수 있겠습니다.
신은 본래 布衣로 躬耕南陽하며 구차히 亂世에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聞達於諸侯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 신을 卑鄙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몸을 낮추시어 세 번이나 草廬之中에 신을 찾아보시고, 신에게 當世之事를 물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후에 국운은 기울었는데, 敗軍之際에 임무를 맡고 危難之間에 명을 받든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謹慎함을 아셨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 大事를 신에게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기를, 부탁을 이루지 못하여 선제의 明察을 해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월에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지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지금 南方이 평정되었고, 甲兵이 이미 풍족하니 삼군을 격려하여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재주를 다하여 姦凶을 들어내고 興復漢室하여 옛 도읍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損益을 짐작하여 충언을 올리는 것은 이제 곽유지, 비위, 동윤의 임무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토벌하여 興復의 임무를 맡겨 주시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先帝之靈에 알리십시오. 만약 興復之言이 없으면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어서 그들의 태만함을 드러내십시오.
폐하 또한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옳은 방도를 찾으시고, 察納雅言하시어 선제께서 남기신 명령을 깊이 좇으십시오.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지금 멀리 떠나며 표문을 올림에 있어서 눈물이 흘러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後主覽表曰:
「相父南征,遠涉艱難;
方始回都,坐未安席;
今又欲北征,恐勞神思.」
후주가 표를 읽고 말하였다.
“상보께서 南征할 때 멀리 가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막 도읍에 돌아왔으니, 앉아 있어도 편안한 자리가 아닐 터입니다.
지금 또 北征하고자 하니, 神思에 수고로울까 염려됩니다.”
孔明曰:
「臣受先帝託孤之重,夙夜未嘗有怠;
今南方已平,可無內顧之憂;
不就此時討賊,恢復中原,更待何日?」
공명이 말하였다.
“신이 선제께 託孤之重을 받고 밤낮으로 일찍이 태만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南方이 이미 평정되었고, 안으로는 돌아볼 근심이 없습니다.
이때를 맞아 討賊하지 않으면, 중원을 회복함은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忽班部中太史譙周出奏曰:
「臣夜觀天象,北方旺氣正盛,星曜倍明,未可圖也.」
홀연히 班部中에서 太史 譙周가 나와 아뢰었다.
“신이 밤에 天象을 관찰하니, 북방에 왕성한 기운이 실로 성대하고, 별은 배로 밝아 도모할 수 없습니다.”
乃顧孔明曰:
「丞相深明天文,何故強為?」
이에 공명에게 일렀다.
“승상께서는 천문에 깊이 밝은데, 무슨 이유로 무리하게 행하십니까?”
孔明曰:
「天道變易不常,豈可拘執?
吾今且駐軍馬於漢中,觀其動靜而後行.」
공명이 말하였다.
“天道는 變易하여 항상 같지 않으니 어찌 구속되겠소?
내가 이제 잠시 軍馬를 한중에 주둔하고 그 동정을 살핀 후에 가겠소.”
譙周苦諫不從。
초주가 굳이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於是孔明乃留郭攸之、董允、費褘等為侍中,總攝宮中之事。
이에 공명이 곽유지, 동윤, 비위 등을 남겨 시중을 삼고 宮中之事를 總攝하게 하였다.
又留向寵為大將,總督御林軍馬;
또 향총을 남겨 대장으로 삼아 御林軍馬를 總督하게 하였다.
陳震為侍中,蔣琬為參軍,張裔為長史,掌丞相府事;
진진은 시중, 장완은 참군, 장예를 장사로 삼아 丞相府事를 관장하게 하였다.
杜瓊為諫議大夫;杜微、楊洪為尚書;孟光、來敏為祭酒;尹默、李譔為博士;郤正、費詩為秘書;譙周為太史。
杜瓊은 為諫議大夫, 杜微、楊洪은 尚書, 孟光、來敏은 祭酒, 尹默、李譔은 博士, 郤正、費詩는 秘書, 譙周는 太史로 삼았다.
內外文武官僚一百餘員,同理蜀中之事。
내외 문무관료 1백여 명이 함께 蜀中之事를 다스리게 하였다.
孔明受詔歸府,喚諸將聽令。
공명은 조서를 받고 승상부에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명령을 듣게 하였다.
前督部鎮北將軍領丞相司馬涼州刺史都亭侯魏延,
前軍都督領扶風太守張翼,
牙門將裨將軍王平,
後軍領兵使安漢將軍領建寧太守李恢,
副將定遠將軍領漢中太守呂義,
兼管運糧左軍領兵使平北將軍陳倉侯馬岱,
副將飛衛將軍廖化,
右軍領兵使奮威將軍博陽亭侯馬忠,
鎮撫將軍關內侯張嶷,
行中軍師車騎大將軍都鄉侯劉琰,
中監軍揚武將軍鄧芝,
中參軍安遠將軍馬謖,
前將軍都亭侯袁綝,
左將軍高陽侯吳懿,
右將軍玄都侯高翔,
後將軍安樂侯吳班,
領長史綏軍將軍楊儀,
前將軍征南將軍劉巴,
前護軍偏將軍漢成亭侯許允,
左護軍篤信中郎將丁咸,
右護軍偏將軍劉敏,
後護軍典軍中郎將宮雝,
行參軍昭武中郎將胡濟,
行參軍諫議將軍閻晏,
行參軍偏將軍爨習,
行參軍裨將軍杜義,
武略中郎將杜祺,
綏軍都尉盛㪍,
從事武略中郎將樊岐,
典軍書記樊建,
丞相令史董厥,
帳前左護衛使龍驤將軍關興,右護衛使虎翼將軍張苞,
以上一應官員,都隨著平北大都督丞相武鄉侯領益州牧知內外事諸葛亮。
전독부 진북장군 영승상사마 양주자사 도정후 위연,
전군도독 영부풍태수 장익,
아문장 비장군 왕평,
후군령병사 안한장군 영건녕태수 이회,
부장 정원장군 영한중태수 여의,
겸 관운량 좌군영병사 평북장군 진창후 마대,
부장 비위장군 요화,
우군령병사 분위장군 박양정후 마충,
진무장군 관내후 장의,
행중군사 거기대장군 도향후 유염,
중감군 양무장군 등지,
중참군 안원장군 마속,
전장군 도정후 원림,
좌장군 고양후 오의,
우장군 현도후 고상,
후장군 안락후 오반,
영장사 수군장군 양의,
전장군 정남장군 유파,
전호군편장군 한성정후 허윤,
좌호군 독신중랑장 정함,
우호군 편장군 유민,
후호군 전군중랑장 궁옹,
행참군 소무중랑장 호제,
행참군 간의장군 염안,
행참군 편장군 찬습,
행참군 비장군 두의,
무략중랑장 두기,
수군도위 성발,
종사무략 중랑장 번기,
전군서기 번건,
승상령사 동궐,
장전좌호위사 용양장군 관흥,
우호위사호익장군 장포,
이상의 모든 관원이 모두 평북대도독 승상 무향후 영익주목 지내외사 제갈량을 따랐다.
分撥已定,又檄李嚴等守川口以拒東吳。
직책을 정한 뒤, 이엄 등에게 격문을 보내 川口를 지켜 東吳를 막게 하였다.
選定建興五年春三月丙寅日,出師伐魏。
건흥 5년 봄 3월 병인일을 선정하고 伐魏하고자 出師하였다.
忽帳下一老將,厲聲而進曰:
「我雖年邁,尚有廉頗之勇,馬援之雄。
此二古人皆不服老,何故不用我耶?」
홀연히 군막 아래에서 한 노장이 성난 소리로 말하였다.
“내 비록 年邁하나 아직도 廉頗之勇과 馬援之雄이 있습니다.
이 두 古人은 모두 늙음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로 나를 쓰지 않습니까?”
眾視之,乃趙雲也。
사람들이 그를 보니 바로 조운이었다.
孔明曰:
「吾自平南回都,馬孟起病故,吾甚惜之,以為折一臂也。
今將軍年紀已高,倘稍有參差,動搖一世英名,減卻蜀中銳氣.」
공명이 말하였다.
“내가 남방을 평정하고 도읍에 돌아온 후에 마맹기가 病故하여 내가 매우 애석해하고 팔 하나를 잃었다고 여겼소.
지금 장군은 이미 年紀가 높은데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됨이 있으면, 一世英名이 흔들리고 蜀中銳氣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雲厲聲曰:
「吾自隨先帝以來,臨陣不退,遇敵則先。
大丈夫得死於疆場者幸也,吾何恨焉?
願為前部先鋒.」
조운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선제를 따른 이래 臨陣不退하고 遇敵則先하였습니다.
대장부는 疆場에서 죽음을 다행으로 여기는데, 내가 어찌 한스러워하겠습니까?
원컨대 前部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孔明再三苦勸不住。
공명이 두 번 세 번 간곡히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雲曰:
「如不教我為先鋒,就撞死於階下!」
조운이 말하였다.
“나를 선봉으로 삼지 않으시면 계단 아래에 부딪혀 죽겠습니다.”
孔明曰:
「將軍既要為先鋒,須得一人同去.」
공명이 말하였다.
“장군께서 선봉이 되려 하시니 반드시 한 사람과 함께 가야 하겠습니다.”
言未盡,一人應曰:
「某雖不才,願助老將軍先引一軍前去破敵.」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원하건대 노장군을 도와 앞서서 一軍을 이끌고 가서 적을 깨트리겠습니다.”
孔明視之,乃鄧芝也。
공명이 그를 보니 鄧芝였다.
孔明大喜,即撥精兵五千,副將十員,隨趙雲、鄧芝去訖。
공명이 크게 기뻐하며 곧 精兵五千과 副將十員을 뽑아 조운과 등지를 따라가게 하였다.
孔明出師,後主引百官送於北門外十里。
공명이 출병할 때 후주는 백관을 이끌고 북문 밖 10리에서 환송하였다.
孔明辭了後主,旌旗蔽野,戈戟如林,率軍望漢中迤邐進發。
공명이 후주를 하직하였는데, 旌旗蔽野하고 戈戟如林하여 군사를 이끌고 한중을 향해 구불구불 출발하였다.
卻說
邊庭探知此事,報入洛陽。
각설하고
邊庭에서 探知此事하고 낙양에 보고하였다.
是日曹叡設朝。近臣奏曰:
「邊官報稱:
諸葛亮率領大兵三十餘萬,出屯漢中,令趙雲、鄧芝為前部先鋒,引兵入境.」
이날 조예는 조회를 열었었는데 근신이 아뢰었다.
“邊官이 보고하기를, ‘제갈량이 大兵 30여 만을 거느리고 나와 한중에 주둔하려 조운, 등지를 前部先鋒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入境하였습니다.’라 했습니다.”
叡大驚,問群臣曰:
「誰可為將,以退蜀兵?」
조예가 깜짝 놀라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가 장수가 되어 蜀兵을 물리치겠소?”
忽一人應聲而出曰:
「臣父死於漢中,切齒之恨,未嘗得報。
今蜀兵犯境,臣願引本部猛將,更乞陛下賜關西之兵,前往破蜀。
上為國家效力,下報父讎,臣萬死不恨!」
홀연히 한 사람이 應聲하여 나와 말하였다.
“신의 아버지가 한중에서 죽어서 切齒之恨이 있는데, 아직 원수를 갚지 못했습니다.
지금 蜀兵이 국경을 범하였으니, 원하건대 신이 本部猛將과 또 폐하께서 내리시는 關西之兵을 이끌고 가서 蜀兵을 깨트리겠습니다.
위로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아래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면, 신은 萬死不恨이겠습니다!”
眾視之,乃夏侯淵之子夏侯楙也。
사람들이 그를 보니 곧 하후연의 아들 夏侯楙였다.
楙字子休;其性最急,又最吝。
하후무의 자는 子休인데 그 성품이 매우 급하고 또 매우 도량이 좁았다.
自幼嗣與夏侯惇為子。
어려서 후사를 잇고자 하후돈에게 아들이 되었다.
後夏侯淵為黃忠所斬,曹操憐之,以女清河公主招楙為駙馬,因此朝中欽敬。
후에 하후연이 황충에게 죽음을 당하자, 조조가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딸 청하공주로써 하후무에게 시집보내 부마가 되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공경하였다.
雖掌兵權,未嘗臨陣。
비록 병권을 잡았으나 臨陣한 적은 없었다.
當時自請出征,曹叡即命為大都督,調關西諸路軍馬前去迎敵。
當時 出征을 自請하니 조예가 즉시 명하여 대도독으로 삼고, 關西諸路軍馬를 징발하여 나가 적을 맞게 하였다.
司徒王朗諫曰:
「不可。
夏侯駙馬素不曾經戰,今付以大任,非其所宜。
更兼諸葛亮足智多謀,深通韜略,不可輕敵.」
사도 왕랑이 아뢰었다.
“안 됩니다.
하후부마는 평소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는데, 지금 大任을 맡김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갈량은 足智多謀하고, 深通韜略하니 輕敵하여서는 안 됩니다.”
夏侯楙叱曰:
「司徒莫非結連諸葛亮,欲為內應耶?
吾自幼從父習學韜略,深通兵法。
汝何欺我年幼?
吾若不生擒諸葛亮,誓不回見天子!」
하후무가 꾸짖었다.
“사도께서는 제갈량과 연결하여 內應하오?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習學韜略하여 深通兵法하였소,
그대는 어찌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시오?
내가 제갈량을 사로잡지 못하면 맹세코 돌아와 천자를 뵙지 않겠다.”
王朗等皆不敢言。
왕랑 등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夏侯楙辭了魏主,星夜到長安,調關西諸路軍馬二十餘萬,來敵孔明。
하후무는 魏主를 하직하고 밤을 새워 장안에 이르러, 관서 제 방면의 군마 20여 만을 동원하고 공명을 대적하러 갔다.
正是:
欲秉白旄麾將士,卻教黃吻掌兵權。
바로 이러하다.
白旄를 잡고 將士를 지휘하게 하려 하면서, 黃吻(어린애)에게 병권을 잡게 하였구나.
未知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승부가 어떻게 될까? 아래의 글에서 설명함을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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