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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인 41

김덕령-관련사항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로라는 길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사라는 사당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공 정려비와 그 비각이 있다. 비문 전면은 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이며, 충장공 김덕령과 그 형재 덕홍, 덕보의 행적, 그 부인 흥양이씨의 행적이 적혀 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효동은 충장공 정려비에 적힌 忠孝之里로부터 비롯한 이름이다. 광주광역시 충효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취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광주광역시에 주둔한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楓岩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건물로,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가 형의 죽음에 상심하여 은거하며 ..

김덕령-평가

묵재 李貴 등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임진기록》에서 김덕령이 올린 1594년 5월 11일자 장계에 따르면, “신은 그저 裨將으로서 선봉에 서서 돌격대의 임무를 맡았을 뿐인데, 이 고개를 넘은 직후 비로소 군에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평하였다. 앞서 3월 2일 장계에서도 “신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동지 몇 명을 불러 모아 한 장수의 선봉이 되고자 하였을 뿐인데 뜻밖에 상께서 장수의 호칭을 내려 주시고 모여 있는 군사를 慰撫해 주시니 신이 감당할 수 없어 밤낮으로 두렵고 민망합니다.”라며 비슷하게 자평하였다. 《서하집》권5에 따르면, 김덕령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비분강개하는 기질을 가졌으며, 풍모는 그다지 長大하지는 않..

김덕령-死後와 追尊

사후 김덕령의 시신은 온전히 거두어져 수레에 실려 광주 석저촌에 도착한다. 역적 이몽학과 한현의 시신이 저잣거리에 걸리고 능지처참을 당한 것에 비하여 대접을 받은 셈이다. 시신에는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가 입혀지고, 장례식은 암울하게 치러진다. 역적으로 몰렸으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장례를 삼엄하게 통제하였다.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에 묻힌다.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詩調인 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이씨는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을 간다. 일본군은 이곳까지 추격하여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녀자를 겁탈하였다. 그녀는 정절을 지키려다가 보리암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순절한다.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거하였다. 여러 곳을 떠돌다..

김덕령-이몽학의 난

1596년(선조 29년) 7월 6일 충청도 鴻山 지역에서 왕족 李夢鶴이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 라는 등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렸다. 한편 7월 12일에 도원수 권율은 충청병사 이시언의 요청을 받아 전라감사 박홍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을 거쳐 尼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권율은 반란군의 세력이 매우 많음을 알고 충용장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부여군 石城에서 크게 이겨 이몽학의 목을 베어 난을 진압한다. 7월 14일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난을 진압하려고 진주를 떠나 충청도로 진군하다 15일에 단계에서 유숙했으며 16일에 함양으로 갔다. 17일에 미처..

김덕령-임진왜란 의병 활동

김덕령의 뜻은 공부에 있었고,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지 아니했으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형 덕홍이 전사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생각하며 날을 지내었다.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의병을 모아 거병하였다. 의병 조직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高敬命을 찾아가서 朴光玉 등과 함께 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다음 달 7월 10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

김덕령-생애 초반

김덕령은 조선 태종 때 의정부 贊成을 지낸 金漢老(양녕대군 장인)의 12대손이다. 광주의 서쪽에 위치한 평장동(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다가 고조할아버지 金文孫이 1470년경 光州盧氏 부인과 결혼하여 처가 마을인 석저촌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곳이 새로운 광산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평장동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은 직선거리로는 5km 안팎으로 가깝다. 증조할아버지 金翊은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才行이 있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無等山 아래 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金鵬燮과 直長 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김덕령-개괄

金德齡(1568년 12월 29일~1596년 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景樹, 시호는 忠壯이다. 별칭은 神將, 超乘將, 翼虎將軍, 忠勇將 등이며, 일본군은 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

최영장군-기타 정보

9. 기타 이성계와의 비교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이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원이 그 자리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요동정벌 실패 후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사..

최영장군-일화, 묘지, 가족관계

6. 일화 《고려사》에서 "평생을 군문(軍門)에 종사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에 불과했다" 라고까지 평가할 정도로 군대 내의 파벌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치와 축재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김용이 주살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용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라는 보옥이 조정에 바쳐져 관인들이 모두 돌아가며 구경하는 것을 보고 "김용의 그 크던 뜻을 겨우 이까짓 물건이 더럽혀 놓았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완상하시는가?" 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고려사》열전에는 어떻게 하면 관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상공(商工)을 배우면 된다." 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매관매직 세태를 비꼬아 대답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의 권세 있는 자들은 서로의 저택에 초대해서 성대한 연회를 ..

최영장군-사후와 평가

4. 사후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두달 후 죽였다. 이성계는 최영이 역모를 꾸몄다고 우왕에게 고하였고, 그 시신을 길에 내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의 재상 중의 한사람인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로, 의정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5. 평가 그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엇갈린다. 첫째는, 고려의 만고 불변의 충신이다. 여러 난신적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 충성하고자 했던 고려의 충신이다. 둘째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다. 고려는 권문세가의 전횡으로 인하여 이미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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