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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인 41

성웅 이순신 - 8.부산해전

釜山海戰 음력 8월 말 이순신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動態에 관한 보고를 입수하여 그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왜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렸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성웅 이순신 - 7.한산도대첩

閑山島大捷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8월 14일(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왜나라의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 함대는 8월 10일(음력 7월 4일)에 출발하여 12일(음력 7월 6일)에 노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14일(음력 7월 8일)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의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낸 다음, 모든 군선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의 ..

성웅 이순신 - 6.옥포해전·사천해전

1.玉浦海戰 玉浦海戰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린 가슴벅찬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27일(음력 5월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의 대부분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2. 泗川海戰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음력 5월 ..

성웅 이순신 - 5.임진왜란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5월 23일(음력 4월 1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왜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 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元均)의 파발이 도착한 5월 26일(음력 4월 16일) 밤 10시였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狀啓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 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

성웅 이순신 - 4.무관생활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

성웅 이순신 - 3.녹둔도전투, 백의종군

3.녹둔도 전투, 첫 번째 백의종군 1587년(선조 20년)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 9월 1일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

성웅 이순신 - 2.무과 급제

2. 무과 급제 1565년 이순신은 방씨(方氏)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에서 낙마하여 왼쪽 정강이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완수하였지만, 결국 낙방하였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式年試) 무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

성웅 이순신 - 1.어린 시절

1.어린 시절 1545년 4월 28일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주었고, 셋째 아들이었던 그에게는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증조부 이거는 정언, 이조좌랑, 통덕랑 수(守)사헌부장령, 1494년 연산군이 세자시절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초에는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 장악원정, 한학교수를 지냈으며, 연산군 초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순천도호부사, 행호군을 거쳐 최종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이백록은 중종 때..

곽재우-망우당집(忘憂堂集)

1. 정의 조선시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71년(영조 47)에 중간(重刊)한 시문집. 2. 개설 『망우당집(忘憂堂集)』은 의병장 홍의장군인 망우당(忘憂堂)곽재우의 시문집으로 그의 내외 후손들이 시문과 각종 사적들을 수집하여 서문과 발문을 붙여 간행하였다. 3. 편찬/발간 경위 『망우당집』의 초간본은 중간 발문을 참고해보면 곽재우의 사후에 그의 아들과 사위 성이도(成以道) 및 내·외손들이 그의 시문을 모아 2권 1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현전하는 초간본에 1629년(인조 7) 곽유(郭瀏)의 발문이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곽재우 사후인 1622년(광해군 14)에서 1629년(인조 7)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간본의 내용이 소략하고 편차가 정돈되지 못..

곽재우설화(郭再祐說話)

1. 정의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郭再祐)에 관한 설화. ​ 2. 내용 ​곽재우(1552∼1617)에 관한 설화는 구전 혹은 문헌으로 풍부하게 전승되었다.​ 구전설화에서 곽재우는 유복자로 태어났고 효성이 지극한 어머니가 시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그를 호랑이에게 던져 주었지만 오히려 호랑이가 보호했다고 하여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화소는 견훤이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고 하는 이야기와 일치한다. ​ 곽재우 부인의 면모 또한 흥미롭다.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은 인물의 자식들인 남매가 조선에 왔다가 곽재우의 도움으로 호랑이를 죽여 원수를 갚는데, 남매의 오빠는 여동생을 그의 부인으로 남겨두고, 그에게 자신의 갑옷을 주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 그러나 갑옷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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