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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인 41

성웅 이순신 - 18.평가

公의 死後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고 있다. 1. 국내 이순신의 평가 선조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뉘앙스를 남기며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류성룡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오윤겸 제문에서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성웅 이순신 - 17.인물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한 반면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는 必死則生必生則死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

성웅 이순신 - 16.家系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楓巖公)은 중종 17년(1522년)에 생원 2등에 합격하였고 참봉을 거쳐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한 뒤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즉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다. 훗날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 현충사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내는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

성웅 이순신 - 15.死後 官職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이순신이 출생한 지 400년 되던 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패배하여, 일본과 관계를 끊고 우리나라(한국)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성웅 이순신 - 14.壬辰倭亂 終戰과 戰死

鳴梁大捷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밖에 되지 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

성웅 이순신 - 13.漆川梁海戰의 패배와 복직

漆川梁海戰의 敗北와 復職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칠천량해전 일본군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부산에서 출진(出陣)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다다유타[島津忠豊] 등의 육군도 칠천으로 향하였으며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원균은 일본군의 수륙양면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도 육지로 탈출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은 한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조선군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성웅 이순신 - 12.두 번째 백의종군

두 번째 白衣從軍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

성웅 이순신 - 11.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다. 한편, 왜의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성웅 이순신 - 10.웅포해전

熊浦海戰 이순신 함대는 1593년 2월 10일(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왜의 수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이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다. 조선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포 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리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전라도 수군은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충무공 장계)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하였다.

성웅 이순신 - 9.원균과의 불화

元均과의 不和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원익(李元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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