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최영장군

최영장군-사후와 평가

구글서생 2023. 4. 18.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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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후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두달 후 죽였다.

이성계는 최영이 역모를 꾸몄다고 우왕에게 고하였고, 그 시신을 길에 내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의 재상 중의 한사람인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로, 의정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5. 평가

 

그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엇갈린다.

 

첫째는, 고려의 만고 불변의 충신이다. 여러 난신적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 충성하고자 했던 고려의 충신이다.

 

둘째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다. 고려는 권문세가의 전횡으로 인하여 이미 그 나라의 명운이 다 하고 있었다. 수술로는 더 이상 살릴 수 없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성의 진정한 아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려 대신에 새로운 세상이 생겨나서 자신들의 고단함을 해결하여 줄 것을 기대하는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계에게 불운하게 죽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했으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는 것이다.

 

◆민간신앙화된 최영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가장 많이 모시는 신령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의 추자도에 최영의 사당이 있다. 상추자도 추자초등학교 북서쪽 벼랑위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사당은 제주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영이 1374년(공민왕 23년)에 제주도에 있는 몽고인 목장을 토벌할 목적으로 9월 30일(음력 8월 24일)부터 10월 4일(음력 8월 28일)까지, 또 토벌 종료 후인 10월 28일(음력 9월 23일)부터 11월 14일(음력 10월 10일)까지 추자도에 머물렀는데, 이 사당은 이때 주민을 많이 도와준 최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영장군 사당. 제주도 추자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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