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聖雄 李舜臣

성웅 이순신 - 4.무관생활

耽古樓主 2023. 2. 26. 07:20
반응형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선조 221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1589 12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 8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 2 선조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 2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

 

1591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에 이순신은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