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聖雄 李舜臣

성웅 이순신 - 3.녹둔도전투, 백의종군

耽古樓主 2023. 2. 2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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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녹둔도 전투첫 번째 백의종군

수책거적도 ( 守柵拒敵圖 )

1587(선조 20) 조산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 91 이순신이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로 가서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사전에 화살과 병기류를 숨겨놓고 있다가, 기습 침입하여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열다섯 필의 말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이경록과 남아서 싸웠고 그 결과 승리했으며 조선인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당시 조산만호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및 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였다.

이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 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를 북병사 이일(李鎰) 녹둔도 함몰이라고 비판하였다. 처음부터 군사 10명이 피살되고 10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말 15필을 빼앗기는 등의 피해가 많았다 하여 이 녹둔도 사건으로 인해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의 비판으로 문책받고 그해 10 해임, 결국 투옥되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경록과 이순신을 투옥한 뒤1587 1010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군기를 그르쳤다"고 장계를 올려 이를 보고하였다.

이일은 장계를 올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경록과 이순신을 군율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경록 등을 변호한 이는 이억기 등 소수였다1016 선조는 한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다며, 북병사에게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조정에서는 백의종군하게 하여 입공자속(立功自贖)할 기회를 주라고 권고하였다.

명백히 이순신은 싸워 이긴 것이며 모든 잘못이 이일 혼자에게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일에게 처벌하지 않고 이순신에게 처벌했다.

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1588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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