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애 후반
조반의 난과 권문세족 숙청
우왕이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비로 삼겠다고 강요하자, 최영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거절하였으나 우왕이 끝내 요구하므로 마지못해 승락하였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우왕 13년(1387)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 ? ~ 1388)의 종 이광(李光)이 조반(趙胖, 1341년 ~ 1401년)의 땅을 빼앗자 조반은 이광을 죽였다. 그리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한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1388년(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하였다. 체포된 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와 토지를 빼앗고 백성들을 해치며 학대하니 이들이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해치는 도적을 제거하려 한 것인데, 어찌 반란을 꾀한다고 하느냐.” 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염흥방은 고문을 통해 기어코 반역사건으로 몰려 했다.
염흥방은 젊어서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개혁을 주창하는 인물이었으나 이인임에게 항거하다 귀양을 다녀온 이후 권문세도가와 친분을 쌓아 탐욕에 찬 간신이 되어 있었다. 우왕은 전횡을 일삼는 것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하여 최영과 이성계에 명하여 병력을 동원, 왕궁을 숙위하게 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을 비롯하여 영삼사사 임견미, 찬성사 도길부(都吉敷) 체포령을 내렸다.
우왕은 인사 발령을 하여 최영을 문하시중, 이성계를 수문하시중, 이색을 판삼사사, 우현보(禹玄寶)․윤진(尹珍)․안종원(安宗源)을 문하찬성사, 문달한(文達漢)․송광미(宋光美)․안소(安沼)를 문하평리, 성석린을 정당문학, 왕흥(王興)을 지문하사,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 『고려사』, 권113,「최영 열전」
오랫동안 전장에서 생활하며 왜구와 야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최영은 공로와 경륜과 함께 염흥방의 무고로 발생된 허위 조반의 난을 기회로 1388년에 문하시중의 지위까지 다시 올랐다.
그러나 1388년 2월부터 명나라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던 중,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이른바 철령위 문제를 계기로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 그 계획이 서자 그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결국 4월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이성계, 조민수를 부장으로 삼아 우왕과 함께 평양에까지 출진하게 되었다.
요동정벌 준비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으로 그곳을 명나라가 다스려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철령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통고를 고려에 보내 왔다.
반발한 최영은 4월, 우왕과 함께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이자송(李子松)이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최영에게 따지자 이자송을 임견미 일당으로 몬 후 곤장 107대를 때린 후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하기로 하였다가 얼마 뒤에 죽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소(작은나라)로서 대(큰나라)를 거역할 수는 없다.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모든 군사가 북쪽으로 몰려간 틈에 왜구가 쳐들어올 소지가 있다.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쓰기 어렵고 군사들은 전염병에 시달린다.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성계 등은 대국을 건드릴 수 없다 하며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였다.
체포와 최후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에 불복,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최영이 각별히 신임하여 자신의 가보인 보검까지 하사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설득으로 회군에 협력하기로 결정,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당시 개경에 있던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
최영은 크게 노했지만 이성계의 편으로 돌아선 장수들에 의해 감금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를 맞아 싸우다가 이성계 일파에 붙잡혀 이내 투옥, 경기도 고봉(高峰 :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개경으로 소환된 뒤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73세. 이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아서, 이에 적분(赤墳)이라 하였으며, 최근에는 유가족이 풀을 심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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