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최영장군

최영장군-간략한 생애

구글서생 2023. 4. 18. 03:47
반응형

​예전에는 國民學校 音樂敎科書에 『최영장군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라져서 요즘 어린이들은 아마도 이 노래를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랫말 自體가 崔瑩將軍의 一生을 要約한 것이었지요.

 

崔瑩將軍의 노래(나운영 작곡 최태호 작사)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崔瑩將軍


이 겨레 이 나라 바로 잡고자
南으로 倭賊을 물리치시고
北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시니
壯하다 그 이름 崔瑩將軍


遙東땅 너는 알라 將軍의 뜻을
威化島 回軍의 怨恨을 품고
조용히 斬刑으로 돌아가시니
슬프다 붉은 무덤 崔瑩將軍

『見金如石』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은 지나친 慾心을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大義를 위해서는 富貴榮華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意味이지요.

요즘의 世態를 돌아보면 더욱 절실(切實)하게 이런 훌륭한 인물(人物)을 필요(必要)로 하는 시대(時代)인 것 같습니다.

최영장군(崔瑩將軍)의 일생(一生)을 간략(簡略)하게 살펴보겠습니다.

 

『見金如石(견금여석)』은 고려(高麗)의 명장(名將)이자 충신(忠臣)인 최영(崔瑩)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훈계(訓戒)하여 한 말입니다.

최영(崔瑩)의 나이 열여섯 살 되었을 때 최원직(崔元直)은 임종(臨終)을 앞두고 아들 최영(崔瑩)을 불러 유언(遺言)을 남겼습니다.

"너는 마땅히 황금(黃金) 보기를 돌같이 하라"

아들 최영(崔瑩)은 평생(平生) 아버지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살았습니다.

조선 전기(朝鮮前期)의 학자(學者)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다음의  구절(句節)이 있습니다.

【崔鐵城瑩 少時 其父 常戒之曰 見金如石】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최영(崔瑩 1316~1388) 장군(將軍)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늘 그에게 훈계(訓戒)하여 말하기를,

"황금(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라고 하였다.

그는 한시라도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비단천에 "見金如石"이라고 새겨서 허리띠에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왕건(王建)의 고려(高麗) 개창(開創)을 도운 동주(東州 = 鐵原) 최씨(崔氏) 가문(家門)으로 최영(崔瑩)의 5대조 최유청(崔惟淸)이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집현전(集賢殿) 대학사(大學士)를 지냄으로써 고려(高麗)의 유수(有數)한 문벌가문(門閥家門)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영(崔瑩)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은 고려말(高麗末) 사헌부(司憲府) 간관(諫官)을 지냈습니다. 최영(崔瑩)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풍채(風采)가 늠름(凜凜)했으며 용력(勇力)이 출중(出衆)하여 문신가문(文臣家門)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兵書)를 읽고 무술(武術)을 익혀 무장(武將)의 길을 걸었습니다.

​최영(崔瑩)은 고려(高麗)에 쳐들어온 紅巾賊과 倭寇를 물리치고 나라 안으로는 여러 번의 난(亂)을 진압(鎭壓)하는 등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지금의 國務總理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의 자리까지 오른 고려(高麗)의 명장(名將)이자 충신(忠臣)이었습니다.

하지만 높은 지위(地位)에 올라 富貴功名을 누릴 位置에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絶對로 재물(財物)을 탐(貪)내는 일이 없이 청렴(淸廉)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살림살이는 여느 백성(百姓)보다 나을 것이 없이 겨우 밥을 먹고 사는 程度였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검소(儉素)한 생활(生活)​로 재물(財物)을 멀리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당시 재상(宰相)들 사이에는 서로 돌려가며 집으로 초대(招待)하여 바둑을 두는 일이 있었는데, 서로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마련하여 누가 더 호사(豪奢)스러운지를 뽐내​곤 하였습니다.

​최영(崔瑩)이 대접(待接)할 次例가 되었을 때 한낮이 다 지나도록 飮食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 무렵에서야 ​상(床)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내놓은 음식(飮食)은 기장을 섞은 잡곡밥에 나물반찬이 전부(全部)였습니다.

그러나 손님들은 워낙 배가 고팠던 터라 남김없이 다 먹고는,​

​"역시 철성(鐵城)집 밥이 제일 맛이 좋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최영(崔瑩)은 웃으면서 대답(對答)하기를,

"이것도 용병(用兵)하는 술모(術謨)요"

라고 하였답니다.​

 

​공민왕(恭愍王)은 원(元)나라가 쇠퇴(衰退)한 틈을 타서 원(元)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몰아내고 옛 高麗 땅이었던 철령(鐵嶺) 이북(以北)의 땅을 회복(回復)하였습니다.

이 때 이성계(李成桂)의 父親 이자춘(李子春)은 當時 이 地域​의 원(元)나라 천호(千戶)였는데, 高麗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小府尹)이라는 벼슬을 받고 ​총관부(摠管府)를 함락(陷落)시키는데 공(功)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최영(崔瑩)은 이성계(李成桂)의 사람됨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그를 아껴 將軍으로 成長하도록 積極的으로 밀어주었습니다.

 

중국(中國)에서는 홍건적(紅巾賊) 출신(出身)의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화난(華南 화남)을 통일(統一)하고 난징(南京 남경)에서 명(明)나라를 세워 황제(皇帝)로 즉위(卽位)하였습니다.

명(明)은 북벌(北伐)을 단행(斷行)하여 세(勢)가 다한 원(元)을 북쪽의 몽골로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1388년에는 공민왕(恭愍王)이 회복(回復)한 ​철령(鐵嶺) 이북(以北)의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設置)하여 요동(遼東)에 귀속(歸屬)시키려고 고려(高麗)에 대하여 이 땅을 반납(返納)하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철령(鐵嶺) 이북(以北)의 땅을 수복(收復)할 때 전투(戰鬪)를 치른 경험(經驗)이 있었던 최영(崔瑩)은 明나라의 말도 안 되는 要求에 크게 반발(反撥)했습니다.

최영(崔瑩)은 건국(建國)한지 얼마 안되는 명(明)나라가 아직은 내정(內政)의 불안정(不安定)으로 전쟁(戰爭)에 전력(全力)할 수 없다고 판단(判斷)하고, 이 기회(機會)에 고려(高麗)의 숙원(宿願)인 高句麗의 옛 땅 요동(遼東)을 정벌(征伐)하여 故土回復을 하자고 주장(主張)했습니다.​​

 

그러나 최영(崔瑩)과 함께 고려말(高麗末) 잇단 외침(外侵)을 잘 막아내어 민심(民心)을 얻고 있던 이성계(李成桂)는 反對하고 나섰습니다.

이성계(李成桂)는 시기(時期)가 군사(軍士)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北方)으로 병력(兵力)을 이동(移動)하면 남쪽에 왜구(倭寇)가 ​들끓을 것에 대한 우려(憂慮),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칠 수 없다는 주장(主張)을 하며 최영(崔瑩)의 요동정벌론(遼東征伐論)에 맞섰습니다.​

 

​하지만 우왕(禑王)은 최영(崔瑩)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요동정벌(遼東征伐)을 강행(强行)하였으며, 서경(西京)인 평양(平陽)까지 ​동행(同行)하였습니다.

그러나 든든한 保護者인 崔瑩이 자신(自身)의 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 禑王은 崔瑩과 함께 平陽에 남고 李成桂와 曺敏修에게 軍隊를 내주어 遼東征伐에 나서게 하였습니다.

 

결국 최영(崔瑩)이 이성계(李成桂)에게 군대(軍隊)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生鮮)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위화도(威化島)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혀 더 이상 진군(進軍)하기 어려워진 이성계(李成桂)는 수차례 回軍意思를 밝혔으나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은 허락(許諾)하지 않았습니다.

결국(結局) 이성계(李成桂)는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왕명(王命)을 거역(拒逆)하고 ​군대(軍隊)를 되돌렸으니 이것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건(事件)으로 요즘 흔히 말하는 쿠데타(coup d'Etat)였지요.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와 신흥 무장 세력(新興武裝勢力)들로부터 신망(信望)을 얻고 있던 이성계(李成桂)는 그들의 지지(支持)로 개경(開京)으로 난입(亂入)하여 정권(政權)을 탈취(奪取)하였습니다.

​이미 대부분(大部分)의 군대(軍隊)를 이성계(李成桂)의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에 내어준 상황(狀況)에서 최영(崔瑩)은 적은 군사(軍士)로 맞서 싸웠으니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체포(逮捕)되어 고봉현(高峰縣 : 高陽)​으로 유배(流配)되었으며, 우왕(禑王)은 강화도(江華島)로 쫒겨났습니다.

이후 최영(崔瑩)은 합포(合浦 : 馬山)와 충주(忠州)로 옮겨졌다가 개경(開京)으로 압송(壓送)되어 결국(結局) 참형(斬刑)되었습니다.​

최영(崔瑩)은 외적(外敵)을 막고, 고려(高麗) 왕실(王室)을 보호(保護)하며, 청렴(淸廉)하기까지 하여 온 나라의 백성(百姓)들로부터 매우 존경(尊敬)을 받았습니다.

權力을 잡은 李成桂가 평소(平素) 존경(尊敬)하는 선배 무장(先輩武將)이었고 자신(自身)을 장군(將軍)의 반열(班列)로 이끌어준 최영(崔瑩)을 참형(斬刑)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理由)이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功勞가 크나 事大의 禮에 어두워 無理하게 遼東을 征伐하려고 軍士를 일으켜 천자(天子 : 明 皇帝)​에 罪를 지어 하마터면 나라를 망칠 뻔 하였으니 戰功이 明나라에 대한反逆罪를 덮을 수 없다.』

​그러니까 최영(崔瑩)에 대한 죄목(罪目)은 명(明)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죄목(罪目)이 하나 더 있었지요.

 

​『왕(王)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지나치게 권세(權勢)를 탐(貪)하였다』​

 

​최영(崔瑩)은 참형(斬刑)에 앞서 ​이렇게 유언(遺言)하였습니다.

 

​『萬若 내가 살아오는 동안 私私로이 慾心을 取한 적이 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로되, 그러하지 않았다면 풀도 자라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실제(實際)로 그의 무덤에는 그의 결백(潔白)을 증명(證明)이라도 하듯이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고 붉은 흙의 봉분(封墳)만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홍분(紅墳) 또는 적분(赤墳)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흉흉(洶洶)한 민심(民心)을 잠재우기 위해서

 

『崔氏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

라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트리게 되었답니다.​

 

​최영(崔瑩)이 죽은 지​ 4년 후인 1392년 이성계(李成桂)는 조선(朝鮮)을 개창(開創)하였고, 그로부터 다시 4년 후에는 최영(崔瑩)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습니다.​

 

조선조(朝鮮朝)에 그의 충절(忠節)을 흠모(欽慕)했던 관리(官理)들이 ​붉은 무덤에 사토(沙土)를 더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祭祀)를 지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풀은 자라지 않고 ​말라 죽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大慈洞) 대자산(大慈山) 기슭에 있는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는 1975년 경기도(京畿道) 기념물(紀念物) 제23호로 지정(指定)되어 문화재(文化財)로 管理되고 있는데, 600 여년 동안 내내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始作)하여 현재(現在)는 풀이 무성(茂盛)하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풀이나지 않는 무덤"의 전설(傳說)만 전(傳)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百姓)들이 최영장군(崔瑩將軍)을 얼마나 존경(尊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실(事實)이 또 하나 있지요.

지금도 민간(民間)의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인물신(人物神)으로 가장 많이 모시고 있는 분이 바로 최영장군신(崔瑩將軍神)이라는 事實입니다. 전국에 약 10여개의 사당이 있응 정도로 민족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최영장군묘역(崔瑩將軍墓域)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보편적(普遍的)인 사각(四角)무덤 양식(樣式)으로 원형(原形)이 잘 보존(保存)돼 있는데, 부인(婦人)과 합장묘(合葬墓)이며, 독특(獨特)하게 뒤편에 부친(父親) 최원직(崔元直)의 묘(墓)가 함께 있는 등 문화적(文化的) 가치(價値)를 평가(評價)받고 있습니다.​

최영장군의 간략한 생애
 

 

 

 

반응형

'한국의 위인 > 최영장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영장군-사후와 평가  (1) 2023.04.18
최영장군-생애 후반  (2) 2023.04.18
최영장군-관료생활  (0) 2023.04.18
최영장군-생애초반  (1) 2023.04.18
최영장군-개괄  (0) 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