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홍의장군 곽재우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耽古樓主 2023. 3. 5. 01:35
반응형

홍의장군 곽재우 像

1.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2. 요약문

곽재우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52(명종 7)에 태어나 1617(광해군 9)에 사망했다.
34세 때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무효가 되자 평생 은거할 결심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통솔력과 전법으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지휘하며 스스로 홍의장군이라 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거듭 고사하여 은거의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시문에도 능하여 저서로 망우당집을 남겼다.

3. 개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 출신.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이다.

4. 생애 및 활동사항

1585(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4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 곧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 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1612(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소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祠宇)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문화체육부가 제정한 199512월의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곽재우(郭再祐))]

 

 

*****참고자료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있는 함경도 관찰사 망우당 곽재우의 묘소다.

부친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정암 곽월, 조부는 성균관 사성을 지낸 곽지번, 증조부는 예안현감을 지낸 곽위다.

공은 지영주사를 지낸 곽경의 7대손이며 청백리에 녹선된 익안군수 곽안방의 5대손이고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대학자 한훤당 김굉필과 가까웠던 진사 규헌 곽승화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진주강씨로 목사를 지낸 강응두의 딸이며 공은 52녀 중 3남으로 곽재희,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곽재록, 참봉을 지낸 곽재지, 현고 곽재기와 동기간이다.

부인은 상주김씨로 만호를 지낸 김행의 딸이다. 장인 김행이 영남의 대학자였던 문정공 남명 조식의 사위였기에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며 남명과 퇴계의 학풍을 함께 이었던 이조참판 문정공 동강 김우옹과는 동서간이다.

공은 22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통덕랑 곽형, 차남은 통덕랑 곽활이고 봉사 신응, 생원 두회암 성이도는 사위들이다.

 

곽재우는 외가가 있던 의령에서 태어났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잃고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남명 조식이 지리산 산천재에서 학문을 닦고 있었기에 그는 그곳으로 나가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이 한층 깊어졌다.

34세에는 문과에 당당히 2등으로 낙점되어 급제할 수 있었으나 장원을 뽑는 과정에서 선조에게 거슬리는 문장이 있었다하여 낙방하였다.

그로부터 그는 더 이상 출사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고향에 내려와 강사를 짓고 스승 남명 조식의 가르침을 실천궁행하며 여생을 마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1592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의를 숭상하고 실천을 중요시했던 그는 보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았다.

조선 최초의 의병장으로 불리는 그는 부친의 홍철릭을 입고 신출귀몰하게 싸우기 시작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공을 올렸다. 함안을 왜적들에게서 구하고 정암진 전투에서 큰 승리를 하여 경상우도의 침입을 막았으며 그 공으로 유곡찰방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1차 진주성 전투에 원군을 파견하여 김시민을 크게 도왔으며 형조정랑, 절충장군에 차례로 제수되었다.

의병활동을 활발히 하던 그는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면서 더 이상 의병이 아닌 관군으로 편성되었고 이후에는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산성을 축조하는 등 방비태세에 만전을 기울였다.

왜적이 잠잠해지자 1595년 진주목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2년 후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왜적의 재침이 자명해지자 조정의 요청으로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로 관직에 나갔지만 제대로 대비도 하기 전에 적들이 쳐들어와 수세적인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별다른 전과를 올리기 어려웠다.

그 해 계모의 상을 당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울진으로 옮겨와서 상복을 입었으며 상기를 채우기도 전에 조정에서 경상우도 방어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전란이 끝나고 상기를 마치고서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봄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후 이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2년 간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그는 선산부사, 안동부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우윤, 삼도수군통제사, 장예원판결사, 함경도 관찰사 등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일부는 잠깐 나갔다가 사퇴하고 대부분은 부임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고향에서 6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숙종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제수받았으며 글씨와 문장에 모두 뛰어났던 그는 망우당집을 남겼다.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곽재우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자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불리했던 전란 초기의 정황을 반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란 이후 중앙의 요직으로 진출한 것도 아니었고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가 보장될 수 있는 공신록에 이름이 오른 것도 아니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된 것도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전란 중 중앙의 요직에 있던 이들 중에서는 별다른 전공이 없음에도 선조를 호종하였다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과 상당히 비교되는데 그러한 대우는 비단 그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의병장에게도 적용되었다.

의병들은 전란 초 상황이 급박했을 때에는 국가에 꼭 필요한 존재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급함이 덜하고 왕실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바닥에까지 떨어지자 집권층은 전란 후를 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란이 종식되면 다시 자신들 중심의 사회로 복구하기를 원했는데 이러한 상황에 의병장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의병장 김덕령은 역모로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 의병들도 관직에 나간 이후에는 요직에 오르지 못했고 대부분은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그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는 보상과 이익을 가늠하기에 앞서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내어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인이었다.

 

묘소는 증조부 곽위 이하 후손들이 안장되어 있는 대지리 선영에 자리잡고 있다.

선영은 화려한 석물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지는 않으나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하여 단정한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이 낮아진 봉분에는 부인 상산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봉분 앞쪽으로 묘표, 상석, 혼유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좌우에는 작은 망주석 한 쌍만이 놓여 있다.

월두형 비신을 지닌 묘표는 崇禎紀元後一百五年壬子 1732년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앞면에는 예서로 贈兵曺判書行咸鏡道觀察使忘憂堂先生郭忠翼公墓 라고 되어 있어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가계와 행적에 대한 간단한 음기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영조의 완론탕평을 지지하여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서예에도 이름 높았던 의정부 좌의정 문충공 학암 조문명(1680-1732)이 쓴 것이다.

많은 재산을 모두 의병활동에 사용했던 망우당 곽재우, 단촐한 그의 묘소를 보면서 많은 것들이 뇌리를 스친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쫓으며 살았던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반면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내놓았던 순국열사의 후손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지금의 현실이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을 망설이게 한다.

곽재우 동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