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73.韓碑(한비)-李商隱(이상은) 본문
1.題目 作者 原文 解釋
韓碑(한비)- 李商隱(이상은) |
元和天子神武姿 彼何人哉軒與羲.
元和天子의 神聖하고 씩씩한 자질, 그는 어떤 사람인가, 軒轅氏와 伏羲氏라네.
誓將上雪列聖恥 坐法宮中朝四夷.
장차 先皇들이 받은 치욕을 씻고, 法宮 안에 앉아 四夷 조회 받으리라 맹세하였네.
淮西有賊五十載 封狼生貙貙生羆.
淮西에 도적들 있은 지 오십 년이라, 큰 이리가 貙를 낳고 貙는 큰곰을 낳은 꼴일세.
不據山河據平地 長戈利矛日可麾.
山河에 있지 않고 평지를 차지한 채,길고 예리한 창들은 태양도 불러 세울 만했다.
帝得聖相相曰度 賊斫不死神扶持
황제가 훌륭한 재상 얻으니 이름하여 裵度인데, 도적들이 베었으나 죽지 않음은 神明의 도우심이었다.
腰懸相印作都統 陰風慘澹天王旗.
허리에 相印을 차고서 都統이 되어, 음산한 바람 부는 참담함 속에 천자의 깃발 휘날렸다.
愬武古通作牙爪 儀曹外郞載筆隨.
李愬 韓公武 李道古 李文通이 용맹한 장수 되고, 儀曹員外郞이 붓을 싣고 뒤따랐으며,
行軍司馬智且勇 十四萬衆猶虎貔.
行軍司馬는 지혜롭고도 용감하였고, 십사만의 군사들 호랑이 큰곰과 같았다.
入蔡縛賊獻太廟 功無與讓恩不訾
蔡州에 들어간 후 도적놈 포박하여 태묘에 바치니, 그 공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聖恩은 한량없었다.
帝曰汝度功第一 汝從事愈宜爲辭.
황제께서 말씀하시길 “너 裵度의 공이 제일 크니 너의 從事官 韓愈가 마땅히 글을 지어야 할 것이다.”
愈拜稽首蹈且舞 金石刻畫臣能爲.
한유는 고개 숙여 절하고 춤추며 “金石에 글을 새기는 일은 신이 할 수 있습니다.
古者世稱大手筆 此事不係於職司.
옛날에는 세칭 大手筆이라 했지만, 이 일은 직책과 상관이 없습니다.
當仁自古有不讓 言訖屢頷天子頤.
仁을 당해서는 자고로 사양하지 않을 뿐입니다” 말을 마치자 천자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公退齋戒坐小閣 濡染大筆何淋漓.
韓公이 물러나 재계하고 小閣에 앉아, 큰 붓을 적셔 쓰는데 그 얼마나 생동한지.
點竄堯典舜典字 塗改淸廟生民詩.
〈堯典〉과 〈舜典〉의 글자 고쳐 쓰고,〈淸廟〉와 〈生民〉의 시를 모방하였다.
文成破體書在紙 淸晨再拜鋪丹墀.
파격적인 문장 이루어 종이 위에 쓰고는 맑은 새벽에 두 번 절하고 붉은 계단에 펼쳐 놓았다.
表曰臣愈昧死上 詠神聖功書之碑.
表에 이르길 “신 愈가 不敏하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으니, 神聖한 功勳 노래한 이 글 碑石에 새겨졌네.
碑高三丈字如斗 負以靈鼇蟠以螭.
碑石의 높이는 세 길이요, 글자는 말[斗]만 한데, 신령한 자라 그것을 등에 지고, 교룡이 비석 위에 서려 있다.
句奇語重喩者少 讒之天子言其私.
句法은 기특하고 용어는 엄중해서 이해하는 이 적으니, 누군가 天子에게 참소하여 그 公平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長繩百尺拽碑倒 麤沙大石相磨治.
백 자 되는 긴 밧줄로 비석 끌어 넘어뜨리고, 거친 모래와 큰 돌로 비석의 글자들을 문질렀지만,
公之斯文若元氣 先時已入人肝脾.
公의 이 문장 天地의 기운과 같아, 앞서 이미 사람들의 폐부로 들어갔다.
湯盤孔鼎有述作 今無其器存其辭.
湯盤과 孔鼎에 새겨진 글귀, 지금 그 器皿은 없지만 그 말은 남아 있도다.
嗚呼聖皇及聖相 相與烜赫流淳熙.
아아,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여, 서로 활활 타오르며 후세에 큰 빛을 드리우리라.
公之斯文不示後 曷與三五相攀追.
公의 이 문장 후대에 보이지 못했다면, 어찌 헌종을 三皇五帝에 비겼으리오.
願書萬本誦萬遍 口角流沫右手胝.
원컨대 이 문장 만 번을 쓰고 만 번을 읽어서, 입가에는 거품이 나고 오른손에는 굳은살 생기고,
傳之七十有二代, 以爲封禪玉檢明堂基.
七十 하고도 二代에 걸쳐 그것을 전하여, 封禪의 玉檢과 明堂의 基石으로 삼았으면.
2.通釋
元和 연간의 天子인 唐 憲宗, 그가 하늘로부터 稟賦받은 자질인 神聖과 威武는 上古시대 軒轅氏와 伏羲氏에 비견될 만하다.
그는 이전의 先代 君王들이 藩鎭으로부터 받은 치욕을 갚아 주고, 法宮에 앉아 四夷로부터 조회하러 온 賀臣들을 접견하리라 결심하였다.
淮西에 叛軍들이 주둔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으니, 마치 큰 이리가 貙虎를 낳고 추호가 다시 큰곰을 낳은 모습이며 대를 이어 생겨난 그들은 너무나도 흉포하다.
그들은 산하의 험고한 곳에 자리 잡지 않고 도리어 평지에서 난을 일으키며, 길고 예리한 창들을 휘두르며 제멋대로 날뛰니 그 위세는 태양도 불러 세울 만했다.
현종황제가 마침내 裴度라고 하는 훌륭한 재상을 얻으니, 그는 도적들의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神明의 도움을 입어 죽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재상의 印을 차고서 친히 병사들을 통솔하고, 都統이 되어 음산한 바람이 부는 暗淡한 날에 천자의 깃발을 휘날리며 출발하였다.
그의 수하에는 李愬, 韓公武, 李道古, 李文通과 같은 몇 명의 용맹한 장수들이 있어 선봉이 되었고, 또 儀曹員外郞이 隨軍書記가 되었다.
또 行軍司馬인 韓愈가 있었으니, 그는 총명하고도 용감하였고 이에 14만 대군은 맹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蔡州를 평정한 후 叛賊인 吳元濟를 사로잡아 조정에 바쳐 太廟에 제사드렸다.
이러한 공적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고, 황제의 恩賜 또한 한량이 없었다.
당시에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너 배도의 공로가 가장 크니, 너의 屬官인 한유는 응당 그것을 글로 적어 남겨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한유가 듣고 곧 황제를 향하여 절하고 아뢰었다. “金石에 새길 문장을 제가 쓸 수 있으니, 종전까지 이런 사람을 ‘大手筆’ ‘大文章’이라 했습니다. 이 일이 비록 저의 소관은 아니지만 자고로 ‘當仁不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유가 말을 마치자 황제께서는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시며 허락의 뜻을 표하셨다.
한유는 곧장 退朝하여 목욕재계하고 작은 書閣 안에 앉아 《書經》의 〈堯典〉‧〈舜典〉의 체제에 비추어보고 《詩經》의 〈淸廟〉‧〈生民〉의 문장을 모방하여, 그것을 조금씩 고치고 가다듬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문장을 창조하여 종이 위에 그것을 썼다.
새벽이 되자 그는 입조하여 황제께 두 번 절하고 大殿 앞 돌계단 위에 자신이 쓴 글을 펼쳐 보였다.
表에서는 “臣 한유 죽음을 무릅쓰고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신성한 功業을 노래한 이 글은 곧 石碑에 새겨졌다.
석비의 높이는 세 길이고, 글자의 크기는 말[斗]만 한데, 아래쪽에는 돌로 조각한 靈龜가 그것을 받치고 양쪽 옆으로는 비석을 감은 교룡이 새겨져 있다.
석비의 구절은 기굴하고 말의 뜻이 심오하여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황제께 참소하여 이 글 속에 한유의 사사로운 뜻이 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백 자 되는 긴 밧줄로 그 석비를 넘어뜨렸고 거친 모래와 큰 돌로 석비 위의 글자들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 귀중한 韓公의 문장은 천지를 가득 채운 大氣와 같아서 그때는 그것이 이미 사람들의 폐부로 스며들어간 뒤였다.
商湯의 세숫대야, 正考父의 솥처럼 지금 기물은 사라졌지만, 그 문장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아아, 그 옛날 聖王과 賢相이 모두 함께 커다란 빛을 발하고 있도다.
만일 韓公의 문장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어찌 헌종이 三皇五帝와 같은 功業을 이룬 줄 알았겠는가.
한공의 문장을 만 번 외우고 베껴서 내 입가에는 거품이 고이고 오른손에는 굳은살이 박히며, 72대가 지난 후에라도 천지에 제사하는 玉檢과 조정을 세우는 주춧돌로 쓰이기를 나는 희망한다.
3.解題
이 시는 韓碑를 노래한 것으로 詠史詩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상은이 이 시를 정확히 언제 썼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張采田의 말을 따르면 젊은 시절의 作인 듯하다.
唐나라의 시는 李商隱‧杜牧 때에 이르러 점점 纖麗하고 柔媚한 詩風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이상은의 시는 詩語의 彫琢과 내용의 艶麗함에 가장 많이 치중하였다.
그러나 〈한비〉는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독특한 格調를 보여준다.
沈德潛은 이 시에 쓰인 말들이 雄建하여 평소의 작품 같지 않고, 시의 내용 역시 위풍당당하여 그의 여타 작품들과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詞意가 섬세하고 뛰어나 오로지 唯美에 경도된 면도 보인다.
특히 ‘帝得聖相相曰度 賊斫不死神扶持’ ‘點竄堯典舜典字 塗改淸廟生民詩’와 같은 句들은 氣格이 古勁하다고 인정받는다.
〈한비〉는 이상은이 한유의 시를 배워 쓴 습작인 듯하다.
나중에 이상은이 쓴 唯美香艶의 시들은 풍격이 이 시와 매우 거리가 있지만, 기교에 치중하고 시어를 까다롭게 고르며 奇僻한 典故 쓰기를 즐겨한 것을 보면, 그가 초기에 한유를 배워 쓴 시들과 대체로 성격을 같이한다.
한유의 〈平淮西碑〉는 裴度가 淮西의 逆徒들을 討伐하여 平定한 과정과 功業을 기록한 것으로, 東漢 班固의 〈燕然山銘〉과 서로 필적한다.
그러나 李愬의 아내가 憲宗의 사촌 누이동생이어서 궁중에 출입하며 그녀의 남편을 대신하여 功을 다투었고, 헌종은 결국 사사로운 人情에 얽매여 판단이 흐려졌다.
이에 명을 내려 碑文을 바꾸게 하였고 결국 段文昌의 비문으로 바꾸어 이소가 적을 토벌한 공로를 더 드러나게 하였다.
지금 〈平淮西碑〉에는 韓碑와 段碑 두 편이 있어 회서를 평정한 功業은 역사의 논쟁거리가 되고 말았다. 후대에 韓碑의 훌륭함을 찬미하면서 배도의 屬將이었던 이소가 공을 다툰 것을 비난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이다.
이에 이상은은 한유를 대신하여 不平한 마음을 가지고 한유의 〈평회서비〉가 天地의 元氣와 같다고 극찬하였던 것이다.
4.集評
○ 裴度平淮西 絶世之功也 韓愈平淮西碑 絶世之文也
배도가 회서를 평정한 것은 絶世의 功이요, 한유의 〈평회서비〉는 絶世의 문장이다.
裴度之功 不足以當愈之文 非愈之文 不足以發度之功
배도의 공은 한유의 문장을 당해내기 부족하니, 한유의 문장이 아니었다면 배도의 공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碑成 李愬之子乃謂沒父之功 訟之於朝 憲宗使段文昌別作 此與舍周鼎而寶康瓠何異哉
碑가 완성되자 李愬의 아들이 이에 죽은 아버지의 공을 말하여 조정에서 그것을 爭訟하자, 헌종이 단문창을 시켜 따로 글을 짓게 했으니, 이는 周鼎을 버리고 康瓠를 보배로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李義山詩云 碑高三丈字如斗 負以靈鼇蟠以螭
李義山(이상은)은 시에서 “碑石의 높이는 세 길이요, 글자는 말처럼 큰데, 신령한 자라 그것을 등에 지고, 교룡이 비석 위에 서려 있다.
句奇語重喩者少 讒之天子言其私
句法은 기특하고 용어는 엄중해서 이해하는 이 적으니, 누군가 天子에게 참소하여 그 公平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長繩百尺拽碑倒 麤沙大石相磨治 公之斯文若元氣 先時已入人肝脾
백 자 되는 긴 밧줄로 비석 끌어 넘어뜨리고, 거친 모래와 큰 돌로 비석의 글자들을 문질렀지만 公의 이 문장 天地의 기운과 같아, 앞서 이미 사람들의 폐부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愈書愬曰 十月壬申 愬用所得賊將 自文城 因天大雪 疾馳百二十里 到蔡 取元濟以獻
한유는 이소에 대하여 쓰기를, “10월 壬申에 이소는 사로잡은 적장을 이용하여 文城에서부터 큰 눈이 내리는 것을 틈타 120리를 빨리 달려 蔡州에 도착한 후 吳元濟를 사로잡아 바쳤다.”고 했다.
與文昌所謂 郊雲晦冥 寒可墮指
단문창은 이 부분을 “교외의 구름 어둑하여 추위는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정도였다.
一夕捲旆 淩晨破關等語 豈不相萬萬哉
하루 저녁에 대장기를 말아 새벽부터 관문을 뚫고 갔다.” 하였으니 이 둘 사이의 거리가 어찌 萬萬배가 아니겠는가.
東坡先生謫官過舊驛 壁間見有人題一詩云
東坡(蘇軾) 선생이 좌천된 관리로 옛 역을 지나는데, 벽 사이에 어떤 사람이 쓴 시 한 수를 보았다.
淮西功業冠吾唐 吏部文章日月光
그 시에 “회서의 공업 우리 唐에서 으뜸이요, 吏部(韓愈)의 문장은 日月처럼 빛난다.
千古斷碑人膾炙 世間誰數段文昌 坡喜而誦之 - 宋 葛立方, 《韻語陽秋》 卷3
천고에 비문은 끊어졌으나 인구에 회자되니, 세간에서 누가 단문창을 꼽는단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동파가 기뻐하여 그 시를 암송했다.
○ 晩唐人古詩 穠鮮柔媚 近詩餘矣
晩唐 사람의 古詩는 穠鮮하고 柔媚한데 근체시의 餘波이다.
卽義山七古 亦以辭勝
즉 義山(李商隱)의 칠언고시 또한 〈이치보다〉 文辭가 우세하다.
獨此篇 意則正正堂堂 辭則鷹揚風翽 在爾時 如景星慶雲 偶然一見 - 淸 沈德潛, 《唐詩別裁集》 卷8
그런데 유독 이 시만큼은 詩意가 정정당당하고 詩語가 하늘을 나는 매처럼 바람을 타고 높이 나는 듯하니, 그때 景星과 慶雲을 우연히 한 번 본 것과 같다.
○ 生硬中饒有古意 甚似昌黎而淸新過之 - 淸 屈復, 《玉谿生詩意》 卷2
生硬한 가운데 古意가 넉넉히 있으니, 昌黎(韓愈)와 매우 비슷하지만 淸新함은 그를 뛰어넘는다.
○ 韓碑詩 亦甚肖韓 - 淸 賀裳, 《戴酒園詩話》
〈韓碑〉 시는 역시 한유의 시풍과 매우 닮아 있다.
○ 未定何年 雖力學韓體 變化未純 恐是少作 - 現代 張采田, 《玉谿生年譜會箋》
몇 살에 지은 작품인지 확정할 수는 없다. 비록 한유의 體를 힘써 배우려 했지만 변화가 純全하지 못하니, 아마도 젊었을 때 지은 것인 듯하다.
5.譯註
▶ 韓碑 : 韓愈가 撰한 平淮西碑를 가리킨다. 淮西節度使 吳元濟가 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元和 12년(817)에 裴度가 총사령관이 되어 이를 토벌했다. 이때 韓愈는 行軍司馬로 종군했는데, 亂이 평정된 후 황제가 한유에게 명하여 〈平淮西碑〉를 撰하게 했다.
▶ 李商隱 : 812~858. 字는 義山, 호는 玉谿生이다. 저서에 《李義山詩集》 《樊南文集》 등이 있다.
▶ 元和天子神武姿 : 元和天子는 唐 憲宗 李純을 가리킨다. 元和는 헌종의 연호이다. 神武는 英明한 威武를 말하는데 주로 제왕이나 將相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姿는 資質의 뜻이다.
▶ 軒與羲 : ‘軒’은 上古時代 전설상의 黃帝 軒轅氏를 말하고, ‘羲’는 太昊帝로 伏羲氏를 말한다. 헌원씨와 복희씨는 전설 속의 聖君인 三皇五帝를 대표하며, 여기서는 憲宗을 비유한다.
▶ 誓將上雪列聖恥 : 唐나라는 玄宗 때 安史의 난 이후 藩鎭들이 割據하여 李希烈, 朱滔, 田悅, 李納, 王武俊, 李錡, 吳元濟 같은 여러 節度使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헌종이 일찍이 여러 강한 번진들을 평정하였다. 列聖은 唐 肅宗, 代宗, 德宗, 順宗 네 황제를 가리킨다.
▶ 法宮 : 황제의 正殿으로 임금이 政務를 처리하는 곳이다.
▶ 四夷 : 원래는 중국 주변의 東夷, 西戎, 南蠻, 北狄 등의 소수 민족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四方의 먼 변방 지역을 범칭한다. 韓愈의 〈平淮西碑〉 銘文에, “이미 淮西의 蔡州 땅을 평정하고 나니 四夷가 모두 來朝했다. 마침내 明堂을 열어 앉아서 그들을 다스렸다.[旣定淮蔡 四夷畢來 遂開明堂 坐以治之]”라는 구절이 있다.
▶ 淮西有賊五十載 : 李希烈‧陳仙奇‧吳少誠‧吳少陽‧吳元濟 등이 淮西를 차지한 채, 唐朝의 命을 듣지 않은 것이 모두 50여 년이었다는 뜻이다.
▶ 封狼生貙貙生羆 : ‘封狼’은 큰 이리이다. ‘貙’는 삵과 비슷하지만 더 크다. ‘羆’는 곰과 비슷한데 몸집이 크다. 이들은 모두 猛獸인데, 여기서는 淮西의 여러 장수들이 사사로이 자리를 서로 이어가면서 조정의 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음을 비유하였다.
▶ 日可麾 : 《淮南子》에, “魯 陽公이 楚나라 장수였는데, 韓나라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한창 전쟁하고 있을 때 해가 지려 하자 창을 쥐고서 해를 부르니, 해가 이 때문에 三舍의 거리를 되돌아왔다.[魯陽公 楚將也 與韓遘難 戰酣 日暮援戈而麾之 日爲之反三舍]”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跋扈하였음을 형용하였다. 1舍는 30리이다.
▶ 帝得聖相相曰度 : 聖相은 곧 賢相이고, 度는 裴度이다. 배도의 字는 中立이고, 河東 聞喜人이다. 《舊唐書》 〈裴度傳〉에, “元和 10년 6월에 詔書를 내려 裴度를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다.[元和十年六月 詔以度爲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고 하였다.
▶ 賊斫不死神扶持 : 王承宗‧李師道가 蔡 땅 정벌을 지연시키기로 모의하고, 자객을 시켜 京師의 大臣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는 宰相 武元衡을 죽인 후 裴度를 습격하여 머리를 상하게 하고 도랑 속에 버렸는데, 배도의 氈帽가 두꺼웠던 탓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가 노하여 “배도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天運이다.[度得全 天也]”라 하고, 곧 그에게 中書侍郞同平章事를 제수하였다. 이때가 원화 10년(815) 6월이었다.
▶ 都統 : 藩鎭토벌군의 총사령관이다. 《新唐書》 〈裴度傳〉에 의하면, 元和 12년(817)에 배도가 자신이 직접 가서 吳元濟를 토벌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배도를 淮西宣慰招討處置使에 임명하였다.
▶ 愬武古通作牙爪 : ‘愬武古通’은 네 명의 武將을 가리키니, 곧 李愬‧韓公武‧李道古‧李文通이다. ‘牙爪’는 어금니와 발톱으로 본래는 새와 짐승의 공격과 방어수단을 말하지만 인신하여 勇士 또는 용맹함을 비유한다. 《漢書》 〈李廣傳〉에, “장군은 나라의 爪牙이다.[將軍者 國之爪牙也]”라고 하였다.
▶ 儀曹外郞載筆隨 : ‘儀曹外郞’은 곧 禮部員外郞으로 당시에 이들은 대부분 군대를 따라다니며 書記의 일을 맡았다. 여기서는 李宗閔을 가리킨다.
▶ 行軍司馬 : 韓愈를 가리키니, 그는 당시 太子右庶子兼御史中丞으로 彰義軍行軍司馬에 충원되었다.
▶ 入蔡縛賊獻太廟 : 元和 12년 10월 唐의 장수 李愬가 淮西의 叛將 吳元濟를 잡아 長安으로 移送하였다. 황제는 興安門에서 사로잡힌 오원제를 넘겨받아 廟社에 바치고, 그 후 저자에서 목 베었다.
▶ 恩不訾 : ‘不訾’는 ‘限量이 없다.’는 뜻이다. 王粲의 咏史詩에, “상투 틀고 明君을 섬기매, 받은 은혜 참으로 한량없도다.[結髮事明君 受恩良不訾]”라는 구절이 있다.
▶ 汝從事愈宜爲辭 : 《舊唐書》 〈韓愈傳〉에, “淮西 蔡州가 평정되고 12월에 裴度를 따라 조정으로 돌아오니, 그 功勳으로써 刑部侍郞을 제수하고 이에 詔書를 내려 〈平淮西碑〉를 짓도록 하였다.[淮蔡平 十二月 隨度還朝 以功授刑部侍郞 仍詔撰平淮西碑]”라고 하였다.
▶ 蹈且舞 : 蹈舞는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朝見하고 慶賀할 때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의 한 가지이다.
▶ 大手筆 : 문장을 잘 쓰는 사람 또는 大著作을 뜻한다. 《晉書》 〈王珣傳〉에,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와 같은 큰 붓을 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큰 붓으로 글 쓸 일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윽고 황제가 죽자 哀冊과 諡號를 모두 王珣이 기초했다.[夢人以大筆如椽與之 旣覺 語人曰 此當有大手筆事矣 俄而帝崩 哀冊諡號 皆珣所草]”는 기록이 있다.
▶ 當仁自古有不讓 : 《論語》 〈衛靈公〉에, “仁을 당해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當仁 不讓於師]”라고 보이는데, 여기서는 직임을 맡는 데 있어서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言訖屢頷天子頤 : ‘頷’은 아래턱인데, 여기서는 동사로 쓰여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이다. 頤는 뺨이다. 한유의 말이 끝나자 헌종 황제가 즉시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며 칭찬과 허락을 표한 것이다.
▶ 淋漓 :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모양이다. 여기서는 한유가 쓴 碑文 속에 담겨 있는 뜻이 막힘없이 자유롭고 지극히 상세함을 가리킨다.
▶ 點竄堯典舜典字 塗改淸廟生民詩 : 〈堯典〉과 〈舜典〉은 모두 《書經》의 편명이다. 文字를 고치거나 바꾸어 글을 짓는 방식을 ‘點竄’이라 한다. 〈淸廟〉와 〈生民〉은 모두 《詩經》의 편명이다. 塗改 역시 點竄과 유사한 방식의 문장 작성법을 뜻한다. 〈堯典〉, 〈舜典〉, 〈淸廟〉, 〈生民〉은 모두 古代 帝王의 功業을 칭송한 문장과 시이다. 이 두 句는 한유가 쓴 〈평회서비〉의 序文과 명문이 《서경》과 《시경》의 문체를 운용한 것임을 말한다.
▶ 文成破體 : 별도의 한 체재를 갖추었음을 지칭한다. ‘破體’는 行書의 變體이다. 唐나라 張懷瓘의 《書斷》에, “王獻之가 王羲之의 行書를 변용하였는데, 그것을 破體書라고 부른다.[王獻之變右軍行書 號曰破體書]”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서법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라, 한유의 비문이 舊體를 잘 변화시켜 創新하였음을 가리킨다.
▶ 丹墀 : 궁궐 안의 붉게 칠한 계단을 말한다.
▶ 負以靈鼇蟠以螭 : ‘靈鼇’는 石碑를 등에 지고 있는 靈龜를 가리킨다. ‘螭’는 석비 양쪽에 새겨진 龍이다.
▶ 讒之天子言其私 : 《全唐詩》 注에, “비문의 내용은 대부분 裴度의 일을 서술하였다. 당시 蔡州에 들어가 吳元濟를 잡는 데 李愬의 功이 첫 번째였으므로 이소는 그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다. 이소의 아내는 唐安公主의 딸이었으므로 궁중에 출입하면서 비문의 내용이 不實함을 호소하니, 이에 황제는 詔書를 내려 한유의 문장을 갈아 없애고 翰林學士 段文昌으로 하여금 글을 다시 지어 돌에 새기게 하였다.[碑辭多敘裴度事 時入蔡擒吳元濟 李愬功第一 愬不平之 愬妻 唐安公主女也 出入禁中 因訴碑辭不實 詔令磨去愈文 命翰林學士段文昌重撰文勒石]”고 하였다.
▶ 湯盤孔鼎有述作 今無其器存其辭 : 成湯의 대야와 孔氏 正考父의 솥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그곳에 새겨진 글귀는 여전히 世間에 傳誦된다. ‘湯盤’은 商나라의 湯임금이 사용했다는 세숫대야인데 그 위에 自警의 뜻을 담은 銘文이 새겨져 있다. 《禮記》 〈大學〉에, “湯王의 盤銘에 이르기를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하였다.”고 적혀 있다. ‘孔鼎’은 孔子의 선조인 孔父嘉가 그의 父親 正考父를 위하여 만든 鼎인데, 그 위에 부친이 지은 銘文을 새겼다.
▶ 相與烜赫流淳熙 : ‘烜赫’은 불이 盛한 모양이고, ‘淳熙’는 크게 빛나는 모양이다. 憲宗과 裴度가 藩鎭을 평정한 빛나는 공훈과 업적이 장차 세대를 거치며 전해내려 오리라는 것을 말한다.
▶ 攀追 : 헌종이 三皇五帝를 뒤따라 그 위업을 이어 본받는다는 뜻이다.
▶ 遍 : ‘週’로 되어 있는 本도 있다.
▶ 七十有二代 : 《史記》 〈封禪書〉에서 太史公은 《管子》를 인용하여, “옛날에 泰山에서 제사를 행하고 梁父山에서 제사를 행한 자가 72家였다.[古者封泰山 禪梁父者七十二家]”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만세토록 後代에 전해진다는 뜻이다.
▶ 以爲封禪玉檢明堂基 : ‘封禪’은 帝王이 天地에 제사지내는 큰 의식을 말한다. 封은 泰山 위에 제단을 쌓고 제사지내어 하늘의 功에 보답하는 것이고, 禪은 태산 아래의 梁父山에 터를 닦고 제사지내어 땅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뜻한다. ‘玉檢’은 祭文이 적힌 玉牒을 넣는 書函의 뚜껑이다. ‘明堂’은 天子가 政令을 반포하고 제후들을 조회하며 제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 周鼎을……여기는 것 : 賈誼의 〈弔屈原賦〉에, “周나라의 솥을 버리고, 큰 표주박을 보배로 간직하네.[斡棄周鼎 寶康瓠兮]”라는 구절이 있다.
▶ 景星과 慶雲 : 景星은 큰 별로 德星 또는 瑞星이라고도 하는데 천자가 封禪을 잘하면 그 보답으로 나타난다 하며, 慶雲은 상서로운 구름으로 景雲 또는 卿雲이라고도 하는데 태평성대의 징조로서 오색구름이 끼는 것을 말한다.
6.引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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