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聖雄 李舜臣

성웅 이순신 - 14.壬辰倭亂 終戰과 戰死

耽古樓主 2023. 3.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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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梁大捷

명량해전 상황도

 

15971025(음력 916),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밖에 되지 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막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중잡록 선묘중흥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후반부터 화전(火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 척을 격파하였지만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왜선은 30여 척보다 많을 것으로 파악된다.

"破賊船五百艘 斬其將馬多時" "적군의 배를 쳐부순 것이 오백척이며 그 장수 마다시를 베었다"<명량대첩비>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露梁海戰

노량해전 지도

1598년 음력 11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군사는 16천명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 음력 11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과 명의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왜란은 끝났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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