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좋은 외타형(外打型)인 데다가 소리를 육중한 종벽 속에 가두어 놓고 아낄 대로 아껴가며 인색하게 흘려보내기에 그렇게 은은하고 여운이 길다.
명화인 밀레의 <晩鐘>을 보면 우리 한국 사람은 산사(山寺)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를 그 그림 속에서 듣는다. 그런데 이 명화의 배경이 된 퐁텐블로의 숲 마을에 가서 들어보면 교회의 종루(鐘樓)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는 은은하다는 것과는 인연이 멀다. 서양 종은 위아래로 돌려가며 종의 內壁을 난타하는 내타형(內打型)이기에 소리가 개방적이고 요란스러워 마치 방울이 흔들리는 듯하다. 기도하는 시간만 알리면 되는 시보성(時報性) 종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종은 외타형(外打型)인 데다가 소리를 육중한 종벽 속에 가두어 놓고 아낄 대로 아껴가며 인색하게 흘려보내기에 그렇게 은은하고 여운이 길다. 시보성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언젠가 옛 경주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의 나지 않는 소리를 손으로 들어본 일이 있다. 종소리가 멎은 지 몇 분 후 종벽에 두들두들 솟아있는 종유(鐘乳) 끝에 새끼손가락 끝을 닿을락말락 얹어 보았다. 약전(弱電)에 감전이라도 된 듯한 진동을 완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진동이 있으면 분명히 소리가 나고 있을 텐데 속인(俗人)인지라 귀로 듣지 못함이 이로써 입증된 것이다.
그 나지 않는 소리의 주파(周波)에 듣는 이의 마음의 주파가 들어맞았을 때 천심(天心)과 인심(人心)이 귀일(歸一)하는 원점 회귀를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한국 종소리를 듣는 묘미인 것이다.
종의 구조에서부터 그것이 완연하다. 우주 삼라만상을 흔히들 ‘사방구천(四方九天)'이라 하는데, 에밀레종의 사방에 구천을 상징하는 아홉 개씩의 종유가 배치된 것이며 종벽에 피리 불며 하강하는 천녀가 새겨진 것이며 종머리를 승천하는 용틀임으로 하여 매어 단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에밀레의 종벽에는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을 포괄하고 있어 보고자 해도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포괄하고 있어 듣고자 해도 듣지 못한다'는 깊은 뜻글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한국의 종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커다란 뜻 속에 자신을 푸욱 담그는 행위인 것이다.
연전의 제야(除夜)에 텔레비전에서는 서울 보신각(普信閣) 신종(新鐘)과 경주의 에밀레 신종(新鐘)의 타종을 동시 중계했는데, 전자는 타종의 간격이 짧고 빠른 데 비해 후자는 몇 곱절 길고 느렸던 것이 대조적이었다. 종소리가 멎지 않았는데 다시 칠 수는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에밀레 신종이 성급히 칠 수 없게끔 여운을 길게 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태고의 여운을 수렴하고자 에밀레종이며 상원사종(上院寺鐘) 등 오묘한 옛 신종 소리를 듣는 것으로 수세(守歲)하는 풍조가 근년에 부쩍 늘고 있다는데, 천진(天眞)한 원점 회귀로 한 해를 맞는다는 점에서 부러운 新風이 아닐 수 없다.
'한글 文章 > 살리고 싶은 버릇'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47. 장승 (0) | 2023.06.15 |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46. 선(禪) (0)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44. 소 (0)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43. 강강술래 (0)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42.내나무 (1) | 2023.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