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124

世家54-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4번째 편으로 前漢高祖 劉邦의 장수이었으며, 蕭何를 이은 相國 曹參에 대한 전기이다. 曹參은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위 平陽侯로 책봉되었고 경포의 반란 등을 평정하였다. 고조가 죽은 뒤 肅何의 추천으로 相國이 되어 惠帝를 보필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韓信과 함께 魏를 평정하고, 趙를 격파하고, 齊를 함락함으로써 마침내 楚를 약하게 만들었다. 蕭何를 이어 相國이 되었으나 제도를 바꾸지도 개혁하지도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曹參이 자기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3-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3번째 편으로 前漢高祖 劉邦의 중요한 謀臣인 相國 蕭何에 대한 기록이다. 蕭何는 沛縣의 말단 관리였으나 나중에 고조 유방의 재상이 되었다. 한나라 유방과 楚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며, 한왕조의 건립과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의 탁월한 공훈을 이편에 기록한 것이다. 소하에 대한 기록은 高祖本紀에도 기록되어 있다. [史記本紀]권08. 高祖本紀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초패왕의 군대가 漢나라를 滎陽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한 것은 蕭何가 關中을 안정시키고 인구를 계산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보급하였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楚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든 때문이었다. 이에..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2-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2번째 편으로 前漢의 제후국인 齊悼惠王 劉肥와 그 후대에 대한 기록이다. 齊悼惠王 劉肥는 고조 유방의 서얼 장자로 생모는 曹씨이다. 고제6년(기원전201년), 韓信을 대신하여 제후국인 齊왕에 봉해졌고, 교동·교서·임치·제북·박양·성양 6군 73현을 통치하였다. 혜제6년(기원전189년)에 죽었다. 시호를 悼惠라 하였고, 아들 劉襄이 작위를 이었다. 齊는 기원전127년, 厲王이 죄를 지어 자결하면서 폐지되었다. 한때 무제의 아들 회왕이 책봉되어 부활하였으나, 기원전110년 회왕이 아들 없이 죽은 후 다시는 설치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고조의 친족들이 적었다. 悼惠王 劉肥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齊 땅을 지켰다. 齊哀王은 여씨 일족의 행위에 분노하여 자기 ..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1-荊燕世家(형연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1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荊王 劉賈와 燕敬王 劉澤에 관한 기록이다. 荊王 劉賈와 燕敬王 劉澤은 漢高祖 劉邦의 먼 친척 형제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때 전공을 세워 왕후로 봉해졌으므로 사마천이 두 사람에 대한 전기를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고조가 秦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劉賈가 함께하였다. 그 후 英布의 공격을 받아 荊과 吳땅을 잃었다. 營陵侯 劉澤이 여태후를 감동시켜 琅琊王에 봉해졌다. 祝午에게 기만당해 齊哀王을 믿어 齊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서쪽으로 관중으로 돌아와서 文帝를 옹립한 공으로 다시 燕王에 봉해졌다. 천하가 미처 평정되지 못한 때 유고와 유택은 친족의 신분으로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에 제21편 ‘荊燕世家’를 지었다.” ..

史記/世家 2023.07.07

世家50-楚元王世家(초원왕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0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楚元王 劉交 및 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다. 楚元王 劉交는 前漢 초기의 황족이자 제후왕이다. 자는 游이며 元으로 漢高祖 劉邦의 동생이다. 유방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入關한 뒤 文信君에 봉해졌으며, 유방을 따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고조6년(기원전201년), 楚王 韓信을 모반 혐의로 잡아들여 봉국을 폐하고 淮陰侯로 격하시키고, 한신의 봉국 중 36현을 받아 楚王이 되었다. 재위23년 만에 죽었고, 맏아들 劉辟非가 일찍 죽었으므로 劉郢客이 뒤를 이었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漢高祖는 속임수로 韓信을 陳縣에서 사로잡았다. 월나라와 楚 사람들은 민첩하고 용맹한 고조의 동생 劉交를 초왕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하여 회수와 사수 유역의 통치를 강화하니 한나라 ..

史記/世家 2023.07.06

世家49-外戚世家(외척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19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外戚에 대한 기록이다. 外戚은 군주의 모친과 后妃의 친족을 말하며, 漢高祖로부터 漢武帝에 이르기까지 韓 후비의 친족에 대한 기록이므로 外戚世家라고 칭한 것이다. 주요 인물로는 呂后, 薄太后, 竇太后, 王太后, 衛皇后, 陳皇后및 尹夫人과 邢夫人, 鉤弋夫人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成皋臺에서 薄氏가 高祖의 총애를 처음 받았다. 竇氏는 뜻을 꺾고 마지못해 代로 갔으며 이에 두씨 일족이 귀한 몸이 되었다. 栗姬는 존귀한 자리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그 틈을 탄 王氏가 뜻을 얻었다. 陳皇后가 너무 교만하게 굴어 끝내 衛子夫가 귀한 몸이 되었다. 衛子夫의 이 같은 덕을 칭찬하는 뜻에서 제19편 ‘外戚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自古受命帝王及繼..

史記/世家 2023.07.06

世家48-陳涉世家(진섭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18번째 편으로 陳涉과 吳廣의 전기이다. 기원전209년, 변방에 수자리를 가던 陳勝과 吳廣이 蘄縣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戰國時代 秦에 병합되었던 6국의 귀족들도 잇달아 봉기하여 독립하였다. 陳涉은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秦에 맞서 張楚를 세우고 왕이 되어 秦을 압박했으나, 장한이 거느린 秦軍의 공격으로 전쟁에 패해서 죽었으며 秦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世家는 사마천이 분봉된 국가의 군주나 제후들 혹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기술한 것으로30세가로 구성되어 있다. 제후가 아니었던 孔子와 陳涉을 世家에 포함시켰던 것은 공자가 혼란한 세상에서 王道를 세우기 위해 의례와 법도를 세웠다는 점과 농민 출신인 진섭이 秦의 폭정에 처음 반란을 ..

史記/世家 2023.07.06

世家47-孔子世家(공자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17번째 편으로 공자의 출생과 평생의 활동과 사상 등의 기록이다. 孔子의 본명은 孔丘이며 춘추시대 魯의 사람으로 유교의 始祖이다. 춘추시대의 정치가·사상가·교육자이며 魯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周왕실이 쇠락해지자 제후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孔子는 禮樂이 무너짐을 슬퍼하여, 經書의 학술을 연구하고 왕도를 재건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이에 자신의 사상을 글로 나타내어, 천하를 위한 예의 규범을 만들고 六藝의 강령을 후세에 남겼다. 이에 제17편 ‘孔子世家’를 지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孔子는 魯 昌平鄕 陬邑에서 태어났다. 其先宋人也,曰孔防叔。 그의 선조는 宋 사람으로 孔防叔이라 하였다. 防叔生伯夏,伯夏生叔梁紇。 방숙..

史記/世家 2023.07.05

世家46-田敬仲完世家(전경중완세가)

이篇은 30세가 중 16번째 편으로 田齊의 시조인 田完과 그의 후대에 대한 기록이다. 陳完은 춘추시대 사람으로 시호는 敬仲이다. 본래 陳의 공자로 陳厲公의 아들이다. 진선공이 첩의 아들인 後日 진목공을 세우고자 태자 어구를 죽였다. 완은 태자 어구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죽임을 당할까 우려하여 齊로 달아났다. 齊환공은 진완을 卿으로 삼으려 했으나, 진완은 사양하고 工正을 지냈다. 완은 陳에서 성을 田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田敬仲完이라고 한 것이다. 진완의 후손들은 齊에서 점차 권세를 잡았고, 8대 종주인 田成子때 齊정권을 독점했고, 기원전386년 田和가 姜姓인 齊의 대를 이어 田姓인 齊로 바뀌었으며, 11세손 제태공이 정식으로 제후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威王, 宣王, 襄王때 전성기였으나, 기원전221년에..

史記/世家 2023.07.02

世家45-韓世家(한세가)

이篇은 30세가 중 15번째 편으로 전국시대 韓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韓은 戰國時代 七雄의 하나로 韓氏는 晉을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춘추시대부터 존재하여 韓武子의 3대손 韓厥(: 韓獻子) 및 아들 韓起(: 韓宣子)는 함께 晉의 6卿의 한 사람이었다. 기원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魏氏와 함께 晉의 知伯을 멸하고 영토를 3분하여, 기원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제후로 승인되어 독립국이 되었다. 기원전355년 昭侯는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책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서 부상하여, 기원전325년에는 王號를 칭하였으나, 얼마 후 秦과 楚의 압박을 받아 合從策·連衡策을 거친 후 기원전233년에는 韓非를 秦으로 보내 秦의 공격을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한비는 李斯 등에게..

史記/世家 2023.07.01